시 읽어주는 신부: 자신의 언어로 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시(詩) 읽어주는 신부] 자신의 언어로 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산다는 것은 그저 생각하고 느끼고 일상적 행위를 하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생각과 느낌과 일상의 삶이 우리 생의 전부인 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 생각과 느낌과 일상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데에 있습니다. 저는 신앙인으로서, 신부로서, 남자로서, 학자로서 생각하고 느끼고 일상을 살아갑니다. 당연히 제 생각과 느낌과 일상의 모습은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아주 조금은 차이가 있습니다.
생각과 느낌과 일상이 비슷한 사람들에게 친밀감을 느낍니다. 사유의 연대, 느낌의 공감, 일상의 친밀성을 발견할 때 기쁩니다. 하지만 동시에,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어떤 성찰들, 다양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예기치 못한 정서와 느낌들, 제 일상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일상의 삶을 발견할 때 또 다른 기쁨을 맛봅니다. 시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생에 대한 비슷한 사유의 흔적과 정서적 감응을 발견할 때 즐겁습니다. 아, 이 시인도 이런 생각과 고민을 했고, 이런 감정들에 사로잡혀 힘들어 했구나 하는 묘한 동질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동시에, 아주 이질적인 상상과 낯선 정서적 세계를 발견할 때 역시 또 다른 즐거움을 얻습니다. 물론 그 낯섦을 이해하기 위해 꽤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말입니다. 그런 노력들을 통해 사람과 삶과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이 확장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시의 세계는 상상과 느낌의 친밀성과 낯섦을 통해 확대됩니다.
김이듬의 시를 읽는 것은 낯섦의 세계와 마주하는 일입니다. 김이듬의 시적 감수성은 저의 시적 취향을 훨씬 넘어 있습니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시적 취향과 시적 감수성을 구분하면서, 취향이 갖는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특성을 비판합니다. 감수성은 취향을 넘어 자유롭게 움직이는 힘입니다. 김이듬의 시는 한국시의 일반적 취향에서 벗어나 있다는 뜻입니다. 기존의 주류적 취향에 균열을 내는 새로운 감수성은 늘 낯선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김승옥 소설이 “감수성의 혁명”(이어령)이라고 명명된 것과 김이듬의 시적 운명과 재능의 토대가 강렬하고 극단적인 감수성에 있다는 평가(황현산)가 저에게는 묘하게 겹쳐 보입니다. 새로움은 언제나 감수성에서 시작됩니다. 새로움은 먼저 느끼고 감각됩니다. 사유와 성찰은 언제나 느낌과 감각 뒤에 옵니다.
저는 남성이며 성직자로 살아갑니다. 당연히 저의 감성은 남성적 감성입니다. 사람의 보편적 감성은 공통적이겠지만 삶의 많은 자리에서 남성과 여성의 감성은 다릅니다. 저는 남성으로서 생각하고 느끼고 남성의 일상을 살아갑니다. 여성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며 살아가는지, 여성의 일상은 어떻게 구성되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여성의 말과 글들을 통해서 조금씩 훔쳐보고 있습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요즘은 남성 시인보다 여성 시인들에 훨씬 더 많은 눈길이 갑니다. 많은 여성 시인들이 있습니다. 여성 시인들 가운데 자신의 여성적 정체성을 뚜렷하게 의식하면서 시를 쓰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여전한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의 몸과 욕망과 감정을 표현하는 시적 감성은 이질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남성중심의 취향 속에서 여성의 정직한 감수성은 소수자로 취급될 위험이 있습니다.
한국시의 장에서 여성의 몸과 욕망과 감성을 적나라하게 노래하는 시인들이 있습니다. 문정희, 김언희, 김이듬, 김선우, 김민정 등입니다. 저에게는 김언희와 김이듬의 시적 상상과 감성이 가장 도발적이고 낯섦의 형식으로 다가옵니다. 김이듬의 시는 기존의 것과 익숙한 것들을 극단적으로 비틀어 은폐되고 도착(倒錯)된 기존의 질서에 균열을 냅니다. 부성과 모성에 대한 신랄한 표현, 에로티시즘과 유혹과 사랑의 도착에 대한 도발적 상상, 세상의 폭력에 대한 저항과 희생양에 대한 애도와 연대, 피투성이가 된 채로 싸우는 시적 자아에 대한 연민 등 간단하지 않는 상상과 느낌들이 김이듬의 시 도처에 산재하고 있습니다.
시인에게 아버지는 간섭하는 남성에 불과합니다. “이제 시니 뭐니 그만 써라. 그거 써서 뭐하냐.” “아버지가, 나름대로 멋을 내고 온 저 노인이/ 아버지로 보이지 않는다.”(‘백발의 신사’) 사실 많은 시인들에게 아버지는 기존의 질서와 억압을 상징하는 존재로 표현됩니다. 김이듬 시인에게는 모성마저도 왜곡된 질서의 한축으로 묘사됩니다. “성경을 다 외우는 이달의 전도 왕 어머니”(‘모계’)는 “숨넘어가는 목소리로 나를 호출해놓고 파마하러” 가고 “똥 싸놓고 벌벌 떠는 아버지를”(‘부부 자해공갈단’) 닦는 일을 딸에게 맡기는 사람입니다. 또 엄마는 “딸 하나 전도 못해 대단히 자존심을 다쳤던 무능한 전도사, 과민한 결벽증에 시달렸던 독거노인”(‘여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입니다. 시인에게는 “놀랍게도 어떤 모성은 잔인한 과대망상”(‘거리의 기타리스트’)입니다. “부친이 죽자 해방감을 느꼈고 모친이 죽자 가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다”(‘아케이드’)고 노래합니다. 시인은 사람들의 세계에서 가장 신성한 영역으로 남겨져 있는 모성에 대해서마저도 신랄한 전복과 해체를 추구합니다.
시인에게 사랑은 낭만적 사랑이 아니라 비루하고 비정한 전투적 현실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꼭 나에게 되돌아왔다/ 떠나겠다는 말을 하려고/ 깨끗하고 어둡게.”(‘습기 없는 슬픔’) “사랑한다면 사랑할 수밖에/ 너와 헤어진 다음 날 그를 사랑했”(‘말할 수 없는 애인’)고 “사랑에 빠질 때마다 나의 기억은 바뀌고 부드러웠던 길은 파여”(‘장갑의 밤’)가며 “사랑한다는 말은 해 본 사람이 더 많이 한다”(‘살아 있는 시체들의 낮’)고 말합니다. “어두운 골목에서 빠져나온 강도가/ 어쩌면 기다리던 애인일지도/ 살인은 멈추지 않고 강간은 끝나지 않고 전쟁은 더욱 치밀해질 것이다”(‘나는 세상을 믿는다’)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사랑받지 못하여/ 끝나는 계절은 없다”(‘자존심’)고 시인은 주장합니다.
기존의 생각과 느낌과 일상에 대해 극단적 해체와 저항과 전복을 꿈꾸는 시인은 여전히 아직도 “나는 빈정거림을 사랑하였으나,/ 장미 덩굴은 불타고 나는 증오가 모자라다./ 자만과 독설과 오열이 모자라서/ 공포 속에 때를 놓치고/ 번개 아래 전율하고”(‘달래보기 시리즈’) 있다고 말합니다. “자다가 일어나 밖으로 나와 절박하지 않게 치욕적인 감정도 없이/ 커다란 펜을 문 채 나는 빤다 시가 쏟아질 때까지/ 나는 감정 갈보, 시인이라고 소개할 때면 창녀라고 자백하는 기분이다”(‘시골 창녀’)고 고백합니다. 그에게는 세상의 “신음이 노래인”(‘간주곡’) 것입니다. 시인은 이 모순된 세상에서 시를 쓴다는 것에 대해 여전히 회의적입니다. “세상에 대한 수많은 질문을 접고 쓰고 있는 것에 대한 기대를 덮었습니다.”(‘유령 시인들의 정원을 지나’) 시인에게는 “말해야 하는 최후의 것이 없”(‘해변의 문지기’)습니다. 그저 “닥치는 대로 쓰고, 써지는 대로 살아”(‘아케이드’)가기를 희망합니다. 시인은 “나는 내가 시적이지 않은 시를 쓰며/ 시인답지 못하게 살다/ 문학적이지 않은 죽음을 맞게 되길 빈다”(‘문학적인 선언문’)고 선언합니다.
나는 춤춥니다 춤추기 시작했어요 파도가 파고드는 검은 모래 위에서 아름다운 눈발은 전조였죠 폭우 속에서
우선 가슴을 옮깁니다 마음이 아니라 말캉하고 뾰족한 바로 그 젖가슴 말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너무 일찍 감정을 가지죠* 다음으로 들린 발을 뒤로 보내는 겁니다
뒷걸음질이 중요합니다 나는 아직 스탭을 다 알지 못하고 몸을 잘 가눌 줄도 몰라요 내 몸은 내가 지탱해야 합니다 허벅지와 허벅지가 스치도록 발꿈치와 발꿈치가 스치도록 이동할 겁니다 모래에 뒤꿈치를 묻은 채 서있지는 않을 거예요 멈춤과 정적을 좋아하지만 추종하지는 않아요 무한을 봐요 파도가 회오리치는
수평선 너머에 시선을 두는 겁니다 눈을 내리깔지 마세요 당신이 오른쪽으로 움직일 때 나는 왼쪽으로 갑니다 당신이 당신 편에서 동쪽으로 갈 때 나는 나의 서편으로 심장을 밀고 가요 가슴 맞대고 춤추는 겁니다 마주보지만 얼굴을 살피지는 말자는 겁니다 바다 바깥으로 해변 밖으로 나가라는 방송이 거듭될수록 서로의 어깨 깊숙이 손바닥을 붙이는 겁니다
이곳에 살기 위하여 피하고 흥분하고 싸우기도 하듯이 나는 춤추겠다는 겁니다 눈감고 리듬을 느껴봅니다
당신이라는 유령, 다가오는 죽음을 인정하고 포옹하면서 매 순간의 나를 석방합니다 나는 춤을 춥니다
뒤로 걷는 것처럼 보일 거예요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말테의 수기』 중에서 -
가장 최근의 시집인 『표류하는 흑발』(민음사, 2017)에 실린 ‘나는 춤춘다’라는 시의 전문입니다. 그 처절하고 치열했던 시인이 뜻밖에도 담담한 노래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최근엔 나도 헌신이니 신성이니 하는 데 관심이 생겼어요. 그래선지 친구들은 내 화풍이 무척 밝아졌다고들 해요.”(‘그리다 만 여자’) 극단적 감성으로 밀어부쳤던 지난 싸움들에 대해 “그것이 정련 과정인 줄 알고 나아갔으나/ 마모 한계선을 넘은 바퀴는 방향을 잃는다/ 지난 생이 내 마지막 실감이었다는 걸 나만 모르는 것 같다”(‘노량진’)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초기의 강렬함에서 후퇴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뒤로 걷는 것처럼 보일 거예요.” 하지만 시인에게 춤추기는 여전히 마음(“가슴”)보다 몸(“젖가슴”)을 옮기는 일이며, 그 몸의 싸움을 “지탱”하기 위해 긴 시선으로(“수평선 너머에 시선을 두는”), 따로 또 함께(“마주보지만 얼굴을 살피지 말자는”) 연대하며, 긴 호흡(“리듬”)으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시인에게 춤추기는 타자와 시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자신을 확장하는 행위입니다.(“당신이라는 유령,/ 다가오는 죽음을 인정하고 포옹하면서/ 매 순간의 나를 석방합니다/ 나는 춤을 춥니다”)
김이듬 시인은 작년 가을 경기도 일산에 「책방 이듬」이라는 작은 서점을 열었습니다. 시인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시의 빛나는 열매가 있다. 그걸 끄집어낼 수 있는 장으로서, 시민과 문인들의 경계를 허물고 만나는 자리로서 자신의 책방이 이용되기를 바란다.”(언론 인터뷰에서)는 희망을 피력합니다. 시인의 책방 간판에는 “You need chaos in your soul to give birth to a dancing star.”(춤추는 별을 잉태하려면 반드시 스스로의 내면에 혼돈을 지녀야 한다 . 니체)라는 글이 적혀 있습니다. 김이듬 시인의 시의 특성을 잘 드러내는 글 같습니다.
김이듬의 시를 읽으며, 여성이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욕망과 일상의 삶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아직도 여전히 여성들은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생을 표현하는 것을 방해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여성의 생각, 여성의 감정, 여성의 욕망, 여성의 일상에 대한 정직한 표현의 감수성은 아직도 여전히 남성중심 취향의 사회에서 배척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남성인 저는 자문해봅니다.
자신의 삶을 자기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현실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삶을 표현할 자기의 언어를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을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고 그저 심정으로 표현합니다. 지식인은 그런 보통 사람들의 생을 복원하고 표현할 책임이 있습니다. 사회학자 노명우는 『인생극장』(사계절, 2018)이라는 책에서 자기 부모의 이야기를 대중영화를 매개로 복원합니다. 구술사가인 최현숙 역시 『할배의 탄생』(이매진, 2016)이라는 책에서 평범한 두 노인의 구술을 토대로 보통 사람의 생을 복원합니다.
혹시 우리의 신앙도 자신의 정직한 언어를 갖지 못하고 제도화되고 형식화된 언어를 통해 고백되고 표현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삶의 자리에서 체험된 신앙이 그 현장의 언어로 표현되고 고백되지 못하고 규범화되고 법제화된 언어로 표현될 때 그 신앙은 생기를 잃어버릴 위험이 있음을 지적합니다.(『언어의 성사』) 자신의 언어로 자기의 신앙을 고백하고 표현할 때 신앙은 더욱 살아 있게 됩니다. 모든 신앙인들이 자신의 언어로 자기의 신앙을 표현하고 고백하고 수행할 수 있도록 작은 도움을 주는 일이 신학자의 또 하나의 역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김이듬의 시를 읽으며 합니다.
[월간빛, 2018년 3월호, 정희완 요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조직신학 교수, 안동교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