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어주는 신부: 풍경을 바라보면서 자신과 삶을 읽는다는 것은, 수도자적 삶
[시(詩) 읽어주는 신부] 풍경을 바라보면서 자신과 삶을 읽는다는 것은, 수도자적 삶
여행을 하는 일과 풍경을 보는 일에 저는 그리 흥미가 없는것 같습니다. 먼저 길을 떠난다는 것이 귀찮은 느낌으로 와 닿고, 풍경은 영상을 통해 보는 것이 훨씬 더 조망적(眺望的) 방식으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저에게 여행은 어디를 가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와 가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자연과 풍경을 바라보는 것보다 사람과 삶을 읽는 일에 더 관심을 가져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는 것, 그 자체가 의미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보면 당연히 눈이 시원해지고 즐거운 느낌입니다. 하지만 그 풍경을 보기 위해 애써 일부러 찾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별로 해 본 적이 없습니다. EBS의 “세계테마기행”과 KBS의 “걸어서 세계 속으로”를 시청하는 것만으로도 여행은 저에게 충분하다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길 떠나기를 귀찮아하는 제 게으름과 번거로움을 싫어하는 제 성향 탓입니다. 차를 몰고 훌쩍 갔다 오는 짧은 여행은 그리 싫어하지는 않지만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는 장거리 여행은 무척 귀찮아합니다. 차를 운전하고 가면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여행은 견딜 수 있지만 탑승수속을 밟기 위해 한참을 기다려야 하고 답답한 비행기 공간에서 몇 시간을 머무는 것이 지겹고 힘들다는 뜻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13년을 사는 동안 비행기 5시간을 타는 것이 귀찮아 뉴욕여행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가끔 놀랍니다. 사람을 만나기 위해 멀리 갈 수는 있지만 자연을 보기 위해 멀리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자연을 찬양하는 시, 풍경을 노래하는 시에 그리 마음이 가 닿지 않았습니다. 자연과 풍경은 그림과 사진과 영상이 더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대상을 묘사하고 서술하는데 있어 이미지의 방식과 언어의 방식은 조금 결이 다릅니다. 눈에 보이는 구체적 사물과 자연은 이미지의 방식으로 더 잘 묘사됩니다. 언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풍경을 서술하는데 더 특화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같은 풍경을 바라보더라도 서술의 방식에 있어 영상과 사진과 그림은 차이가 있습니다. 영상은 말 그대로 객관적인 방식으로 전체적인 풍경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풍경에 대한 사진과 그림은 사진작가와 화가의 주관적 관점과 시선에 따라 그 모습이 조금 달라집니다. 좋은 사진과 좋은 그림은 그 안에 작가의 창의적인 사유와 고유한 내면의 풍경이 담겨 있습니다. 결국 저에게는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는 주체의 사유와 내면의 풍경이 언제나 더 중요했습니다. 적어도 저는 시선의 대상으로서의 풍경보다는 그 풍경에 조응하는 주체의 내면 풍경에 더 관심이 간다는 뜻입니다.
조용미(1962년생)의 시가 그랬습니다. 조용미의 시는 자연의 풍경을 노래하지만 시적 언어를 통해 자기 영혼의 지도와 내면의 풍경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조용미는 “존재의 비밀을 감추고 있는 기이한 풍경들을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끈덕지게 주시하였고 그 결과를 단아한 문장들로 우리에게 풀어놓은”(조재룡) 시인입니다. 조용미의 시는 “외부의 풍경과 내적 심리가 조우하는 순간 빚어지는 갈등이나 파문을 성찰적으로”(남진우) 드러냅니다. 조용미의 시를 읽는 일은 사람과 세속의 삶을 떠나 자연 속에서 침묵의 수행을 하는 수도자의 내면 풍경을 읽는 것 같습니다. 세속의 구도자들이 저잣거리의 사람들과 그들의 삶을 통해 생의 비의를 찾으려 한다면 자연 속의 구도자들은 자연과 우주의 풍경과 침묵의 대화를 하며 자연(사물)과 자신의 일치를 경험하며 어떤 신비를 찾아가는 것 같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 오늘 하루 이 시간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은/ 저 바위가 서 있는 것과 나무의자가 놓여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자미원 간다」) 시인에게 풍경은 일종의 계시이며, 풍경을 보며 자신의 운명을 예감합니다. “그것은 啓示”(「골목길」)였고, “내가 본 풍경이 내 운명이 되고”(「내가 본 풍경이」), “기이한 풍경이 우리를 신비롭게 했다 거기서 우리는 문득 태어났다.”(「기이한 풍경들」)
시인에게 풍경은 신비를 드러내는 계시이기에 풍경을 ‘바라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사람과 삶을 ‘읽는다는 것’과 자연과 우주의 풍경을 ‘바라본다는 것’은 비슷하면서 동시에 미묘한 차이점을 드러냅니다. ‘읽는다’는 동사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개입의 태도를 뜻한다면 ‘바라본다’는 동사는 수동적이고 수용적인 태도를 강조합니다. ‘바라본다’는 동사 안에는 공감과 인정과 수용의 의미가 조금 더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시인 역시 바라보는 시선의 힘에 대해 고백합니다. “직관적인 시선의 힘은 사물이나 풍경에 내재되어 있는 생명을 일깨운다. 풍경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그것에 귀기울이며 존재가 심화되는 것을 느낀다. 시선을 내부로 파고들수록, 사물들은 몸을 더 쉽게 열어준다.”(『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뒤표지 글에서)고 말입니다.
사물들은 자신의 “내부 밖에 있는 나”(「바라본다」)이며, 사물들을 바라본다는 것은 결국 그 사물들과 관계하고 있는 자신의 내면을 읽는 일이며 동시에 자기 “영혼의 지도를 완성”(「天下圖」)하는 일입니다.
풍경을 바라보는 일은 대상을 읽는 일이며, 그 대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일입니다. 조용미 시인에게 바라본다는 것은 결국 읽는 일이며 성찰하는 일입니다. 풍경을 바라보는 일은 결국 자신과 생의 비의를 읽어내는 일입니다. 조용미 시인 역시 자신을 알기 위해, 자신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풍경을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많은 시인들과 사상가들의 주장처럼,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결국 자신과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과 삶을 알기 위해 사람과 삶에 대한 텍스트를 읽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삶을 알기 위해 자연과 우주라는 풍경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시인은 고백합니다. “삶의 미망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팔만의 장경과 일천칠백의 선의 공안이/ 필요한 것은 아니”(「바람의 행로」)라고 말입니다. 풍경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하나의 공부요 구도의 길일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하늘은 글자 없는 경전을 펼쳐 보인다/ 그걸 읽다 보면 주문처럼,/ 별들이 몸에 와 박힐 것이다.”(「천상열차분야지도」)고 시인은 노래합니다. 시인에게는 풍경을 바라본다는 것이 생에 대한 경전을 읽는 일입니다.
풍경을 바라본다는 것은 사물이 들려주는 무언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입니다. “풍경은 무수한 말들을 뿜어낸다. 나는 그것을 받아 적는다. 때로 풍경의 침묵이 너무 완강해 그것을 도저히 읽어낼 수 없는 날들이 오기도 한다. 그럴 때면 풍경보다 더 깊이, 오래 침묵해야 한다.”(『일만 마리 물고기가 山을 날아오르다』, 시인의 말에서) 또한 바라본다는 것은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대상(사물과 풍경)에 투여하기에 앞서 먼저 대상의 사정을 헤아리는 일입니다. 시인은 “짙은 밤색 수도복에 세 개의 매듭이 달린 밧줄 허리끈을” 바라보며 “그 매듭에 결박해 둔 어떤 심정”을 먼저 헤아립니다.(「매듭」)
“저렇게 많은 풍경이 너를 거쳤기”(「풍경의 해부」) 때문에 시인에게 풍경은 다른 시간의 사람과 연결해주는 매개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의 장소를 시차를 두고 본 사람들은 그 장소의 풍경을 매개로 서로 내면적으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영천 은해사 가는 길에서 시인은 “내 나이의 아버지가 거기에서 본 것은 내가 본 것과 같은 것이었을까”(「버즘나무 껍질 다 벗겨져 하얗게 빛나는」)라고 묻습니다. 감각되는 풍경을 통해 시인은 다른 시간의 사람과 공감의 연결을 꿈꿉니다. “우리는 같은 것을 보지 못하겠지만, 같은 시간을 겪지도 못하겠지만/ … // 그저 감각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곳의 멈추었다 미끄러지는 모든 시간들을.”(「풍경의 귀환」)
풍경은 다양합니다. “창밖엔 규정되지 않은 풍경들이 줄지어 서 있”(「터널」)습니다. 친근하지만 불안한 풍경들(「적목」)과 “숨이 멎을 듯한 풍경들”(「천리향을 엿보다」)이 있고, “영혼을 흔들어 놓은 풍경들”과 “다시 보지 못할까 두려워 안타까이 내가 몸에 찬찬히 새겨 버린 풍경들”(「풍경의 온도 . 굴업도」)도 있습니다. 풍경은 때로 “내가 보고, 내게 보이는 것들/ 내게로 와 내 눈에만 살며시 보이는 헛것들”(「나의 사랑하는 기이한 세계」)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풍경은 “내 몸의 연골과 어떤 경로를 거쳐 접합”하고 “마음과 어떤 구조로 친밀하게 결합하여 나를 바꾸어 나가”기도 합니다.(「풍경의 온도 . 굴업도」) 풍경은 바라보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바라보는 주체와 관계를 맺습니다. “너무 많은 아름다운 풍경이/ 내 눈을 멀게”(「단 한 번의 풍경」) 할 때도 있고, “풍경들은 나를 잘 읽지 못 한다”(「구름 저편에」)고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풍경은 말과 행동으로 자신을 드러내기 보다는 빛과 색으로 자신을 표현합니다. 풍경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 미세한 빛과 색의 기미를 한 올 한 올 잡아”내는 일이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슨 빛과 색”을 찾는 일입니다.(「우리가 아는 모든 빛과 색」) 조용미 시인이 바라본 풍경들은 무엇보다 어둡고 검었습니다. 비애, 슬픔, 고통, 고독 등을 안고 있는 검은색이 시인의 풍경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검은색의 유현함에 사로잡혀 이리저리 검은색 지명을 찾아 떠돌았”(「초록을 말하다」)다고 시인은 고백합니다. 하지만 시인에게 검은색은 단순히 슬픔과 부정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시인의 논리에 따르면 “붉은색과 검은색의 심연이 죽음이거나 비애인 것은 얼룩 때문이”(「얼룩」)지 검은색 자체가 부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시인 자신이 대표시의 하나로 뽑은 「검은 담즙」이라는 시에서 시인은 검은색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서술합니다. “너의 죄는 비애를 길들이려 한 것이니 幻이 끝나고 滅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삶은 다시 시작되는 것을 담즙이 모여 떨어지는 黑河는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을 지상에서 가장 헛된 것이라 부르겠다”고 말입니다. 검은색(죽음)과 초록(생)은 본질적으로 같고 흑에서 초록이 나왔다고 시인은 생각합니다.(「초록을 말하다」) 시인은 “부드럽고 따스한 검은빛은/ 눈이 부시다”(「黑」)고 노래합니다. 하지만 검은색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일은 지난한 여정을 요청합니다. “한 가지 색에 깊이 들어앉은 다른 색을 발굴하기까지의 기나긴 과정에 대해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일은 가능할까/ 나약한 존재를 자극하는 섬세한 색의 변화를,/ 그 미묘한 느낌의 일렁임을”(「미학적 인간에 대한 이해」) 조용미 시인이 바라보는 풍경은 아름답지만 아프고 슬픈 풍경입니다. 시인이 그려내는 풍경을 통해 바라보는 생은 어둡고 검었습니다.
적벽 오고 말았습니다, 물염정 아래 호수의 물은 말라 수면이 여러 겹 물염적벽 아래 떠다닙니다 당신은 흐르는 강물 따라 다녔겠지요 망향정에 와 노루목적벽 마주 보며 흔들리듯 서 있으니 수수만년 전의 당신이 나를 여기 보냈다는 걸 알겠습니다 적벽 와서야 허전한 한 목숨 겨우 이어붙였다는 느낌은
나는 가장 맑은 눈으로 적벽 보려 합니다 물염적벽, 노루목적벽, 망미적벽, 창랑적벽, 이서적벽…… 적벽의 이름들 안타까이 구슬처럼 입안에서 꿰어봅니다 무덤에 업힌 듯 박혀 있는 부서지고 나뒹구는 석탑이 절터임을 말해주지만 호수의 물과 파헤쳐진 대숲의 어두운 그림자들이 기억을 방해하고 간섭합니다
당신도 한동안 적벽의 풍경을 몸 안에서 구하였던 것은 아니겠지요 어느 생에선가 미묘란 무엇이냐 물었더니 당신은, 바람이 물소리를 베갯머리에 실어다 주고 달이 산 그림자를 잠자리로 옮겨준다* 말했습니다 여러 생을 통과하면서 혹 미묘가 맑아져 표묘가 되기도 하였는지요
찬연함이 얇아져 처연함이 되는지 나는 이 시간에 오롯이 놓여 적벽에 쓸쓸히 물어봅니다 내 몸을 입고 나온 어떤 이도 적 벽 흐르는 강물 바라보며 미묘와 표묘를 아득한 눈빛으로 중얼거리게 될는지요 수수만년 전 적벽을 보았던 게 누구인지 이제는 알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어느 생에선가 나는 다시 적벽 와야 하겠지요 흐르는 구름과 적벽에 물드는 단풍을 바라보며 오래 거듭되는 幻의 끝을 물으며 서 있어야겠지요 후생의 어디쯤에서 나는 나를 알 수 있을까요 풍문도 습관도 회환도 아닌 한 사람의 지극한 삶을, 향기와 음악처럼 두루 표묘하여 잡을 수도 알 수도 없는 간결한 한 생을 말입니다 * 〈벽암록〉에서 인용.
「적벽에 다시」라는 시의 전문입니다. 전남 화순 적벽의 풍경과 시인의 내면의 풍경이 미묘하게 교차되어 있습니다. 풍경과 생에 대한 시인의 사유와 감각이 모두 들어있는 시입니다. 조용미 시인의 모든 시의 내용이 이 시 하나에 압축되었다는 느낌을 줍니다. 풍경을 정확히 읽기 위해서는 “가장 맑은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풍경은 시간과 공간의 엇갈림 속에서 바라보는 주체의 내면 풍경과 삶의 의미를 알려줍니다. 비록 풍경이 “미묘”와 “표묘”의 방식으로, 때로는 “찬연함”으로 때로는 “처연함”으로 그것을 알려주지만 말입니다. 적벽, 검붉은색은 반복되고 변주됩니다. “물염적벽, 노루목적벽, 망미적벽, 창랑적벽, 이서적벽.” 풍경이 반복되듯이 우리의 생도 반복됩니다. 시인에게, 우리의 생은 “죽도록 되풀이해야 하는 악보 위의 음표 같은”(「악몽 - 백사시옹」) 것입니다. 시인은 “왜 모든 것은 반복하는 것일까 왜 모든 감각은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나는 것일까 이 별의 모든 것들은 왜 끊임없이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것일까 반복되는 삶이 지루하지 않고 무시무시하다”(「墨白」)고 말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반복 속에서 “우리는 차츰 각자의 색을 갖게 되는 것”이며, 그래서 오히려 “모든 것이 반복되어도 생은 아름답구나”라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당신의 거처」) 어쩌면 시인에게 삶은 기억하는 일이며 반복하는 일입니다. 지구는 “기억의 행성”(「기억의 행성」)이며, 우리는 “아름답고 비루하고 쓰라리고 신비한 이 삶을 또다시 살아내야”(「구름의 서쪽」)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의 삶을 살다가 또 다른 나의 삶으로 돌아오는 것은 치밀한 환상이 필요한 일”이며, “나는 내가 아닐 수 있는 가능성”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고 시인은 노래합니다.(「나의 다른 이름들」)
조용미의 시를 읽을 때마다 시인이 수도자를 닮았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조용히 풍경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하느님을 묵상하는 수도자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자연과 사물의 풍경을 통해 자신의 내면의 풍경을 바라보는 시인은 일종의 물아일치(物我一致)의 경지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물성(物性)과 영성(靈性)은 언제나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찾고 따름에 있어서 사목자의 방식과 수도자의 방식이 무슨 그리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 시끌벅적한 저자거리의 삶을 읽으며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과 고요한 침묵의 자연 풍경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은 같은 행위의 변주일 뿐입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곧 읽는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문제는 그 시선이 정직하고 따뜻한 시선인지 아니면 왜곡된 편견의 차가운 시선인지에 달려있습니다. 오늘의 교회와 신앙인들 안에 정직하고 따뜻한 시선이 많아지기를, 조용미의 시를 읽으며 희망합니다.
[월간빛, 2018년 8월호, 정희완 요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조직신학 교수, 안동교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