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어주는 신부: 여자의 삶, 여성의 글쓰기
[시(詩) 읽어주는 신부] 여자의 삶, 여성의 글쓰기
글을 읽는다는 것은 그 무엇에 대해 배우는 행위이며 그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사람들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일이 쉽지 않은 저에게, 또 새로운 체험을 찾아 활발하게 움직이는 체질이 아니어서 몸의 행동반경이 아주 좁은 저에게, 글 읽기는 경험의 세계를 확장시키고 사람과 삶에 대한 이해의 반경을 확대시켜 줍니다. 글 읽기에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정서와 비슷한 것들을 조우하는 데서 오는 공감과 안도감의 확인이라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명확한 개념으로 잡아내기 어려웠던 자신의 어렴풋한 생각과 감정과 정서가 타인의 글에서 분명한 개념을 통해 설명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는 데서 오는 쾌감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떤 글에서 제가 잘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했던 생각과 감정과 정서를 만날 때, 그 낯섦과 미지(未知)의 경이감이 가져다주는 짜릿함이 가장 기쁩니다. 물론 그 낯섦과 미지는 자신의 기존의 인식과 감정과 정서의 경계를 찢어야 하는 고통을 수반하지만 말입니다.
책과 신문과 잡지라는 전통적 매체들을 통해 글을 읽기도 하지만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특히 블로그(blog)를 통해 글을 자주 접하기도 합니다. 블로그의 글들에는 개인의 사적인 생각과 감정과 정서가 담겨있어 한 개인의 내밀한 속내를 읽는 즐거움이 큽니다. 제가 가끔 방문하는 젊은 여성들의 블로그는 여성들의 사유와 감정과 정서를 알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합니다. 아, 물론 그들의 글을 훔쳐보지만 결코 관음은 아닙니다. 제가 잘 알지 못했던 세계에 대한 인식의 확장입니다. 여성들은 이런 것에 주로 관심을 갖는구나. 그들은 이럴 때 감정과 정서가 깊이 반응하는구나. 사유하는 주제들과 감정과 정서가 반응하는 방식들이 확실히 남자들과 다른 부분이 많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배웁니다.
이규리 시인(1955년생)은 젊은 여성들이 좋아하고 자주 인용하는 시인인 것 같습니다. 몇 년 전에 이규리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문학동네, 2014)를 읽었지만, 그렇게 강한 느낌으로 남아있지는 않았습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한 번 읽고 느낌이 확 오는 시집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또 제 자신의 시집 읽기 방식에도 많은 문제점이 있습니다. 시집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어야 하는데, 다른 숙제들이 많으면 밀린 시집을 한꺼번에 소설 읽는 것처럼 읽기도 합니다. 당연히 그 시집 안에 담겨있는 깊고 섬세한 인식과 다채롭고 미묘한 정서를 놓치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규리 시인은 제가 즐겨 들어가는, 출판사 편집 일에 종사하는 어느 여성의 블로그 안에서 자주 인용되는 것을 보고 다시 관심을 갖고 읽은 시인입니다.
이규리 시인의 시는 여성적 주체가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남성인 저로서는 읽기가 어려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자든 남자든 하나의 인격인 이상 한 인격으로서의 인식과 감정과 정서를 공유합니다. 성별의 구분을 떠나서 한 인간으로서 사유하고 느끼고 반응하는 방식은 거의 비슷하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성적(여성적, 남성적) 주체의식이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성으로서의 자의식 또는 남성으로서의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적 주체성이 강하게 담겨있는 글은 다른 성을 가진 사람이 이해하고 접근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같은 성적 주체성을 가진 사람들끼리는 공유하고 전유할 수 있는 영역이 많아 이해하기가 쉽겠지만 말입니다. 이규리 시인의 시가 보여주는 인식과 감정과 정서 안에는 여성의 자의식이 깊이 내포되어 있고 여성적 주체가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이규리 시인의 시가 비교적 쉬운 비유와 은유의 방식으로 서술되고 있지만, 그 안에 숨어있는 사유와 감정과 정서의 결을 따라 가기가 저에게는 어려웠다는 변명을 이렇게 길게 하고 있습니다.
이규리 시인은 사회적 삶 안에서 발생하는 사건과 외적 일들에 대한 사유와 정서적 반응과 느낌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사소한 일상의 구체적인 현실과 자기 내면의 정직한 흐름에 집중하는 것 같습니다. 이규리의 시는 “언어를 다독이면서 온화하고 속 깊은 성찰을 부드러운 화법”으로 표현하는 “담담한 현실주의”의 특성을 보여줍니다.(박상순) 에로스와 욕망에 대한 전복적이고 전위적인 상상마저도 절제된 표현으로 담담하게 서술합니다. “설명을 덧붙이기보다 설명을 줄일 때”(『시는 어떻게 오는가: 한국대표시인 22人이 들려주는 시적 순간들』, p.238) 시적 본질이 더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라는 이규리 시인의 태도는 그의 시적 스승인 이성복 시인을 닮은 것 같습니다. (이규리 시인이 보여주는 절제의 미덕은 「변두리」 라는 시가 현대시학 2009년 9월호에 실린 처음의 형태에서 2014년에 출간되는 세 번째 시집에서 어떻게 더 간결하고 쉬운 표현의 방식으로 수정되는지를 비교해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규리 시인은 늦은 나이에 첫 시집을 상재했습니다. 그의 첫 시집 『앤디 워홀의 생각』(세계사, 2004)에는 아버지라는 현실과 아버지라는 상징으로 드러나는 남성중심사회 안에서 그 세대의 여성이 겪은 억압과 내면적 갈등이 적나라하게 표현됩니다. 딸 많은 집안의 딸로 태어난 시인은 “내가 막 태어났을 때 엄마는 나를 강보에 싼 채 몇 시간 윗목에 밀쳐놓았다”고, 그래서 그 “윗목에 밀쳐둔 몇 시간의 비애가 내 생을 지배하리라고” 고백합니다.(「윗목」) 그 세대의 여성들에게 아버지는 “다른 사람의 삶에 간섭했던 허세”(「가려움증」)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밤 9시엔 내 아버지가 서 있습니다. 칼로 내리쳐도 지워지지 않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9시는 아버지의 세상이 문을 닫는 시각이지요. 책을 읽거나 밥을 먹거나 섹스를 할 때에도 나는 9시에 멈추어야 합니다.”(「아직도 9시가 있다」) “내 삶의 곳곳에 밑줄을 그었던 아버지,/ 아버지의 밑줄을 빠져 나오지 못한/ 욕망들이 울며 잠들던 때”(「아버지의 방」)에 시인은 글을 쓰며 자신을 벼려왔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라는 상징은 여성의 욕망을 억누르고 통제하려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십이지신상은 왕릉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풀밭을 지키고 있어요. 출렁이는 초록의 관능을 누르고 있어요.”(「괘릉에 마음을 걸다」) 하지만 억압은 오히려 관능을 낳습니다. 억압은 욕망의 해방적 성격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몸이 붉게 우는 울음”(「겹동백」)을 터뜨리며 “슬픈 감옥인 코르셋을 벗”(「코르셋」)고, “브래지어에서 출발하는 사춘기”(「재촉하다」)를 노래하고 싶었지만, “상상은 재빨리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길을 내지만 말하지 못하는 저 사람 섬에 갇힌다”(「섬」)고 시인은 탄식합니다. 상상의 세계에선 “사막의 페니스를 물고 기꺼이 혼절하는 것을”(「사막 편지 2」), “모래무덤이 몇 차례 체위를 바꿨다”(「사막 편지 4」)는 것을 생각할 수 있었지만, 정작 현실에선 “중요한 대목을 놓쳤던 자신의 삶의 방식”(「월식」)을 시인은 안타까워합니다. 자기 세대의 여자의 생은 진열대에 선 마네킹 같다고 말합니다. “젖가슴과 허리둘레와 사타구니로/ 참 많은 사람들이 끈적끈적한/ 눈 지문들 붙여 놓고 갔다”(「마네킹」)고 시인은 서술합니다. “아버지를 겨울산에 묻고/…… / 무수한 아버지와 가벼워진 상징들/ 탁탁 틀어 햇살 아래 넌”(「상징을 삶다」) 후에야 비로소 “육체의 비밀, 두근거림을 나는 이제야 말한다”(「얼레지꽃, 그 형이상학」)고 시인은 고백합니다. 아버지라는 ‘상징을 삶은’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자신의 생이 그래도 보랏빛이었다고 노래합니다. “맥문동은 흔들리면서 생을 완성한다.… 생이 기우뚱 풍경들을 놓칠 때 왜 보랏빛일까.”(「보랏빛이라는 것」)
두 번째 시집 『뒷모습』(문예중앙, 2006)에서 시인은 보다 편안한 태도로 사물과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시인은 시로서 만물상(萬物相)을 그려냅니다.(김수이) 내면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신을 정직하게 응시할 수 있게 된 시인은 이제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들에 대해 따뜻한 시선과 생의 미세구조에 대한 부드럽고 섬세한 성찰을 보여줍니다. 다가오는 대상들에 스며드는 자신의 사유를 미묘하게 드러냅니다. “커피잔에 남아 있는 누군가의 립스틱 자국처럼/ 낯선 틈이 하나 끼어든다.”(「그 비린내」) 삶에 배어 있는 냄새와 사람의 냄새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병실에서 “소독약 냄새를 밀어낸 국물 냄새의 힘이/ 뻐근한 시간을 견디게”(「국물 냄새」)하고, “사람들은 냄새를 밀어내려다/ 어느새 냄새가 되어 간다”(「석유 냄새 때문에」)고 시인은 노래합니다. 삶 속의 사람들, 사람들 속의 삶, “그 측은한 모습들을 베끼고 옮기는”(『뒷 모습』 시인의 말) 일이 시입니다. 묵묵히 견딘 시간들과 눈물이 배어 있는 뒷모습이 삶의 진실을 드러낸다고 시인은 믿는 것 같습니다. “뒤쪽이 진실이다”는 미셀 투르니에와 “해답은 뒤에 있다”(「뒷모습」)는 시인은 서로 닮아 있습니다. 두 번째 시집에서도 시인은 여전히 여자의 억압되어 온 욕망, 숨겨진 욕망을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말하지 않는 것들이 내 안에도 너무 많다”(「젖」)고, “내 안에 숨겨놓은 벌건 아가리를”(「이런 일,」) 모르는 척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여전히 “사타구니 불안을 영 마감할 수 없는/ 여자 이야기,/ 참 길고 질긴 이야기”(「와리바시라는 이름」)를 놓지 않고 있습니다. “서서 오줌 누고 싶다/ 선득한 한 방울까지 탈탈 털고 싶다”(「서서 오줌 누고 싶다」)고 도발합니다. 첫 시집에 실린 시인의 사진 속의 이미지는 차분하고 가녀립니다. 그 여린 이미지 속에 내재된 정열과 불온함이 억압의 산물인지 아니면 근원적인 것인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아, 시인의 스승인 이성복의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사, 2003) 역시 그렇습니다.
세 번째 시집인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에서 시인은 자기 긍정과 자기 생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나이에 이르렀음을 보여줍니다. 자기 안의 색깔을 보여줄 수 없었던, “아직 내색에 무심”(「내색」)했던 시절과 “저, 저 하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그런 때”(「저, 저, 하는 사이에」)를 보낸 연후이어서인지 시인의 성찰은 담담하면서 깊어진 것 같습니다. 제 외로움을 지켜 아침을 만난 것처럼 최선을 다했다고 시인은 노래합니다.(「특별한 일」) 세 번째 시집 안에는 일상의 소품적 성찰이 빛을 발하는 시가 많습니다. 시인은 결혼식을 보며, “인연은 무엇을 흥정할 것인가/ 일생이 서로 건네고 받아야 할 교역”(「결혼식」)임을 알아챕니다. 살구나무를 흔드는 사람을 보며 “모르고 때리는 일이 맞는 이를 더 오래 아프게 할 것”(「나무가 나무를 모르고」)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사과를 껍질째 먹으면서 “껍질에 묻어 있는 의심/ 이미 우리가 먹어온 달콤한 불안/ 알고 보면 의심도 안심의 한 방편”(「껍질째 먹는 사과」)이라는 것을 생각합니다. “불안이 꽃을 피운다는 걸”(「불안도 꽃」), 바람은 “밖에서 부는데 왜 늘 안이 흔들리는지”(「허공은 가지를」), “결국 젖게 하는 사람은/ 한때 비를 가려주었던 사람”(「많은 물」)이라는 생의 역설을 노래합니다. “비유는 하나로 여럿을 사는 일”인데 우리는 “제 생이 통째 비유인 걸 모르는 채”(「비유법」) 살아간다고 시인은 담담하게 서술합니다. 시인을 오랫동안 괴롭혔던 아버지에 대한 생각도 자신의 방식으로 정리했음을 드러냅니다. “아버지들은 지키는 것만 가르쳐주었지 사용하는 건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그건 지킬 수 있는 방식이 아니었겠죠.”(「나의 고전주의」) “아버지가 그립지만 같이 있고 싶단 뜻은 아니에요.”(「꽃나무의 미열」) 아마도 시인은 우리 생의 “운명적 시차”(유시춘)를 깊이 깨달은 것 같습니다.
신호등은 이제 점멸신호로 바뀌었다 그냥 알아서 해도 좋다는 시간인 것이다 종일 꽉 쥐고 있던 마음을 내려놓는다
이제 당신이 하고 싶은 걸 해 봐, 하고 싶은 거……
신호등 두 눈은 가라는 건지 마라는 건지 애매하게 말하던 사람 같은데 누가 뭐라던 결국 긍정과 부정 사이에서 제 생을 점멸하는 거 아닐까
길가 쑥부쟁이들도 깜, 빡, 불빛에 불려나왔다 들어가고
저 시간이 더 길었다면 우리가 그걸 할 수 있었을까?
변두리의 밤은 아득하고 쓸쓸하기만 한데
세 번째 시집에 실린 시 「변두리」의 전문입니다. 정말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시입니다. 늦은 밤 인적도 별로 없고 차량도 거의 없는 황량한 도시 변두리 거리에서 점멸하는 신호등을 보며 누구나 한 번쯤은 느낄 수 있는 정서가 담겨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소한 풍경 속에서 우리 생에 대한 깊은 통찰을 읽어내고 그것을 담담하게 표현하는 일이란 그리 쉬워보이진 않습니다.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만 어영부영 시간을 놓치다가 전화를 하기도 전에 덜컥 세상을 떠난 사람에 대한 미안함을 노래한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라는 시와 이 「변두리」라는 시는, 적어도 저에게는, 우리 생의 “운명적 시차”가 가져오는 엇갈림의 현기증을 가장 절절하게 표현한 시 같습니다. 그저 마음의 소리를 내어 그 두 편의 시를 읽어보시길 희망합니다. 시는 오직 읽기를 통해 자신의 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엉뚱한 이야기 같지만, 이규리 시인의 시에 나오는 시인과 아버지의 이미지가 신자와 교회(성직자 중심의 교회)의 이미지와 겹쳐 보입니다. 저는 성직자로서 살아갑니다. 저의 이미지가 신자들의 삶에 밑줄을 긋는, 사랑의 이름으로 통제하고 억압하는 아버지의 이미지를 닮아 있지는 않은지 저어하는 마음이 듭니다. 신앙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살아내는) 것인데 말입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선생으로 살아갑니다. 교육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읽어주는(이해하는) 일이며, 스스로 깨닫도록 도와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시험보다는 자기 글쓰기를 자주 요구합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일이며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일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의 언어로 자신의 삶을 서술할 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아름다운 일인지, 이규리 시인의 시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월간빛, 2018년 12월호, 정희완 요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조직신학 교수, 안동교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