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어주는 신부: 추억한다는 것은 - 청춘의 초상
[시(詩) 읽어주는 신부] 추억한다는 것은 - 청춘의 초상
시간을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시간의 거리를 가늠해 보며 아쉬워하기도 합니다. 사람과 사물 속에서 세월의 흔적을 발견하고 아득해하기도 합니다. 오늘을 중요하게 여기는 현재주의자로 살고 싶은데, 과거의 시절을 돌아보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미래의 어느 시점을 상상하는 일이 잦아집니다. 냉정한 현실주의자임을 자처하고 살아왔는데, 지나간 시간과 흐르는 시간과 다가올 시간이 아쉽고 서럽고 무서워집니다. 노년으로 가는 길목에서 긴 홍역을 치르고 있는 느낌입니다. 신학교에서 젊은 청춘들과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이 어린 친구들과 살아가는 일은 그 자체로 충분히 즐겁습니다. 자신의 나이마저 잊게 해주는 마약 같다는 생각도 합니다. 신학교의 청춘들은 조금은 답답하고 형식적인 틀 안에서의 삶이라, 저마다의 아픔과 갈등을 갖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늙은 제 눈에는 그것마저도 부러움으로 다가옵니다. 물론 저의 시점에서 보는 것이라 당연히 청춘들의 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아, 신학생들이 저의 이 부러워함에 대해 화를 낼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차적 관점의 간격이 주는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외출해서 시내의 거리로 가면 제 눈에는 노인들의 모습만 들어옵니다. 생각보다 많은 노인들이 시내를 배회하고 있습니다. 간혹 남자 노인들끼리 허장성세의 모습으로 무리지어 움직이는 모습도 볼 수 있지만 대부분은 쇠락과 소멸의 기미를 드러내는 안쓰러운 모습입니다. 그리 멀지 않은 시점에 저 역시 그런 모습으로 걷고 있으리라는 상상에 쓸쓸해집니다. 노인들과의 시간의 거리가 청춘들과의 시간의 거리보다 훨씬 가깝다는 사실이 슬프게 합니다. 지난 내 청춘의 시절보다 다가올 내 노년의 시점을 상상하는 일이 더 많아졌습니다. 아득한 시절의 청춘보다 가까운 노년에 대한 상념이 더 짙어져 간다는 뜻입니다.
시간의 흐름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자주 호출합니다. 하지만 참 묘합니다. 우리가 기억으로 불러내는 시간은 아득한 거리의 시간이 아닙니다. 아마도 십 년 또는 이십 년의 안쪽입니다. 그 거리를 넘어서면 많은 것들이 흐릿해집니다. 유하 시인(1963년생)은 지난 시간에 대한 그리움을 자주 노래합니다. 유하 시인은 자신의 산문집 『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문학동네, 2012)에서 고백합니다. “지워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 영원히 내 삶의 처음들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감. 그 되돌아갈 수 없음의 절망이, 나를 추억케 한다… 추억만이 유일하게 되돌아감을 허용한다… 추억한다는 것은 덧없이 사라질 이 순간의 생명력을 연장시키는 일이다. 난 확장된 이 순간의 넓이 속에서, 살아 있음의 현재를 더 오래 음미한다.”(p.16)고 말입니다. 이 고백은 유하 시인의 전 시집을 관통하는 정서입니다. 유하 시인은 1989년부터 2000년 사이에 여섯 권의 시집을 출간했습니다. 그 이후론 더 이상의 시집을 내지 않고 영화감독으로 살고 있습니다. 유하의 시에는 삼십대의 시점에서 유년 시절과 청소년기를 추억하는 내용이 많다는 뜻입니다.
유하 시인은 두 번째 시집인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문학과지성사, 1991)로 대중들과 평단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그 시집은 비슷한 연배인 장정일 시인의 시집 『햄버거에 관한 명상』(민음사, 1987)과 더불어 한국 시단에 대중적 정서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유하 시인은 특히 키치(kitsch, 저속하고 싸구려라는 의미)적 감성을 탁월하게 묘사한 시인으로 평가됩니다. 유하의 시 안에는 1980년대 한국 청춘들의 정서가 가득히 묻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만화, 포르노, 티브이 드라마, 싸구려 영화, 유행가, 무협소설, 광고”(『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 p.128)의 내용에 대한 패러디가 장광설처럼 그의 시에 난삽하게 펼쳐집니다.
전북 고창의 한 시골에서 태어난 소년이 서울로 이사옵니다. 김승옥의 소설이 시골 출신이 도시에서 겪는 정서적 갈등을 서술한 것처럼, 유하의 시 밑바닥에도 이 정서적 균열현상이 깊은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소년은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심드렁해합니다. “학교를 저주하며/ 모든 금지된 것들을 열망하며”(「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1」) 악기들을 전문적으로 사고파는 세운상가를 서성거리며 재즈음악에 심취하면서 광고와 영화에 등장하는 여자들(심혜진, 최진실, 비비안 리, 문희, 리즈 테일러, 남정임, 지나롤로 브리지다, 정윤희, 이자벨 아자니, 최수지, 이미연)을 상상하며 불량청소년(?)으로 살아갑니다.(「미인병」) “운명이여, 나를 내버려두게나/ 즉흥적으로 이 세상에 와서/ 재즈처럼 꼴리는 대로 그렇게 살다”(「재즈 1」) 가겠다고, 학교에서 배운 것은 인생의 일할 밖에 되지 않았다고 시니컬하게 노래합니다.(「학교에서 배운 것」. 유하 시인은 자신의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학교의 폭력성을 고발합니다) 만화방을 전전하면서 만화책과 무협 소설을 읽으며 청소년기를 보내다가 대학시절에는 무협소설 대필 작가라는 아르바이트도 합니다.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후미진 만화방보다 나은 곳은 없어라.”(「드루 배리모어, 장미의 이름으로」) 그의 시를 읽다보면,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숱한 영화를 빌려보고, 어둡고 칙칙한 동시상영관에서 온갖 영화를 보며, 생의 이면을 미리 훔쳐봐서인지, 조금은 애늙은이 같은 조숙한 표정을 지으며 걸어가는 덩치 큰 청소년이 상상됩니다. “동시상영의 세상 읽기가/ 나를 얼마나 조로하게 했던지.”(「파고다 극장을 지나며 . 80년대의 끄트머리에서」) “나 폐허의 콜로세움 안에서, 화신극장에 앉아 있는 나를 보았네/ 화신극장은 내 마음속에 끈질기게 살고 있네/ 살아서 그토록 낡은 삶의 형식에 대해 말하고 있네.”(「로마 콜로세움 속의 화신극장」) 유하 시인은 시 「달의 몰락」에서 자신의 자화상을 이렇게 서술합니다. “김씨 집안의 종손인”(그의 본명은 김영준입니다) 그는 세속적 질서에의 편입이 주는 “안락과 즐거움 대신 일탈의 고독을 택했다고”, 자신은 “쓸모없음을 사랑한다”고, 그리고 “그 쓸모없음에대한 사랑이” 자신을 시 쓰게 했다고 고백합니다.
유하의 시적 상상은 무협소설적 상상과 영화적 상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유하 시인의 첫 시집 제목도 『무림일기』(중앙일보사, 1989)입니다. ‘무림일기’라는 부제가 붙은 연작시 안에서 무협소설의 형식으로 한국 정치사회의 세태와 풍속을 풍자하고, ‘영화사회학’이라는 부제가 붙은 연작시 안에서 자신이 본 영화를 통해 청춘의 욕망과 감성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유하의 시는 청춘들이 뿜어내는 욕망의 풍속도 같습니다. “내가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나를 낳았다는 생각.”(「재즈 6」) “압구정동은 체제가 만들어낸 욕망의 통조림 공장이다/…/세속도시의 즐거움에 동참하고 싶은 자들 압구정동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길 힘쓰는구나.”(「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2」) 시인 스스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무림, 압구정동, 세운상가, 경마장…… 욕망이 긴 세월 나를 꽤나 여러 곳으로 끌고 다녔던 것 같다.”(『천일馬화』, 시인의 말)고 말입니다. “아무리 老子然해봐도 육체와 정신만 늙어갈 뿐/ 그것을 날다람쥐처럼 움직이는/ 욕망은 좀처럼 늙질 않는구나.”(「老子가, 진지를 권할 때」) “욕망은 끝없이 비울음소리를 낸다.”(「빗줄기 속으로」) 그 욕망의 비울음소리는 숱한 사념과 잡념을 불러일으키고, 그 사념과 잡념들이 시로 표현된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나 역시도 시를 쓸 때면 내 안에 흩어져 있는 무수한 잡념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불러내려 애쓰곤 한다.”(『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 p.206) 유하 시인에게 시는 “욕망의 무늬를 끝없이 확대재생산”(「거미, 혹은 언어의 감옥」)하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태와 풍속에 대한 키치적 상상으로 “호흡하는 순간의 관능을 새겨놓기 위하여”(「사진기 속의 우주」) “삶에 대하여 쉼 없이 재잘대며”(「자갈밭을 걸으며」) “시를 쓰며 기를 쓰며 살아”왔다고, 그래서 자신의 시적 언어는 “작곡이 아니라 연주에 불과”하다고 시인은 고백합니다.(「모텔, 카사블랑카」) 하지만 시인의 또 다른 한편에는 지나간 것들에 대한 그리움과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추억이라는 서정적 정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도시의 비루한 욕망을 넘어 “소멸하는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고 싶”(「태풍의 작명가를 위하여」)은 욕망이 시인의 마음 한쪽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지워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기 때문에 “추억하는 사람”을 통해 소멸하는 것들이 살아남기를 바라는 시인의 마음입니다.(「살구나무 있던 자리」) “삶이란 외마디 발광”(「사진기 속의 우주」)이며 “살아온 만큼 난 더러워졌고 또 더러워져 갈 것이”(「환멸을 찾아서 5」)어서 “산다는 것은 매순간 황홀한 몰락”(「구름의 운명」)이라고 노래했던 시인이 “살아 있음이란, 어쩌면/ 그리움의 이름으로 세상을 끌어들여/ 오후의 적요 속에서 푸르게 자기를 익혀가는 일”(「산토리니, 내 마음의 포도나무 묘지」)이라고 잔잔히 노래합니다. “세속의 욕망, 그 반대편에 서서 한번쯤은/ 그리움을 그리워해보고 싶은”(「그리움을 그리워해보고 싶은 것이다 . 몽생미셸 수도원 1」) 마음이 있었다고 시인은 고백합니다. 사실, 처음부터 유하 시인에게는 “시 쓰는 행위가 절대 향수”(「노스텔지아 . 영화 사회학」)였습니다.
“지나온 날들을 오래 뒤돌아보는 사람”(「시월의 발라드」)의 정서는 쓸쓸함의 감상(感傷)입니다. “헤비메탈을 부르다 뽕짝으로 창법을 바꾸는/ 그런 삶을 살지 않으리라”(「세상의 모든 저녁 3」)고 다짐하지만 “사라지는 것만이 사라지는 것들을 생각한다”(「7월의 강」)는 것을 깨달은 시인은 한없이 감상적이 됩니다.
여의도로 밀려가는 강변도로 막막한 앞길을 버리고 문득 강물에 투항하고 싶다 한때 만발했던 꿈들이 허기진 하이에나 울음처럼 스쳐간다 오후 5시 반 에프엠에서 흘러나오는 어니언스의 사랑의 진실 추억은 먼지 낀 유행가의 몸을 빌려서라도 기어코 그 먼 길을 달려오고야 만다 기억의 황사바람이여, 트랜지스터 라디오 잡음같이 쏟아지던 태양빛, 미소를 뒤로 모으고 나무에 기대 선 소녀 파르르 성냥불처럼 점화되던 첫 설레임의 비릿함, 몇 번의 사랑 그리고 마음의 서툰 저녁을 불러 모아 별빛을 치유하던 날들…… 나는 눈물처럼 와해된다 단 하나 무너짐을 위해 생의 날개는 그토록 퍼덕였던가 저만치, 존재의 무게를 버리고 곤두박질치는 물새 떼 세상은 사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기에 오래 견디어 낸 상처의 불빛은 그다지도 환하게 삶의 노을을 읽어 버린다 소멸과의 기나긴 싸움을 끝낸 노을처럼 붉게 물들어 쓸쓸하게 허물어진다는 것, 그렇게 이 세상 모든 저녁이 나를 알아보리라 세상의 모든 저녁을 걸으며 사랑 또한 자욱하게 늙어 가리라 하지만 끝내 머물지 않는 마음이여, 이 추억 그치면 세월은 다시 흔적 없는 타오름에 몸을 싣고 이마 하나로 허공을 들어 올리는 물새처럼 나 지금, 다만 견디기 위해 꿈꾸러 간다
「세상의 모든 저녁 1」이라는 시의 전문입니다. 문학적으로 빼어난 시라기보다는 삶의 멜랑콜리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시입니다.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한 정치인의 빼어난 선거 구호가 시사하듯이, 모든 욕망과 세속의 것들에서 무장해제 되어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걸어갈 수 있는 저녁의 풍경과 정서는 우리를 쓸쓸하지만 평안하게 합니다. 세상의 모든 저녁에 사람들은 저마다 약간은 감상적이 됩니다. 저녁은 한낮의 분주함에서 벗어나 느림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때입니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이미 사라졌”(「풍금이 있던 자리 . 고창초등학교 교정에서」)습니다. 사라진 것들은 오직 추억(기억) 안에서만 생명을 연장합니다. 저녁은 추억의 시간입니다.
존경했던 문학적 스승이었던 평론가 김현의 죽음(1990년)과 시적 동료이며 형이었던 진이정 시인의 죽음(1993년)은 유하 시인을 더 추억의 행위에 몰두하게 한 것 같습니다. “무엇이 두꺼운 삶이고 무엇이 얇은 삶인가/ 그분은 끝없는 질문을 내게 던지며 서 계시는 것 같았어/ 그것이…… 내게 비친 그분의 마지막 모습이었어.”(「두꺼운 삶과 얇은 삶 . 김현 선생님을 추억하며」) “나는 살아서 울음에 취하고/ 이 추억의 저녁을 지나, 마침내 울음이 나를 버릴 때,/ 세상의 병을 다 앓고난 마음이/ 내 안의 그대를 영영 데려가리라”(「상수리나무숲에서 . 진이정 시인을 그리며」)고 탄식합니다. 청춘의 긴 홍역을 치른 후 시인은 자전거의 노래를 부르며 일상의 사소한 풍경으로 귀환합니다.(「自畵像」) 이제는 “생의 시간을 길게 확장시키며” “추억보다 느리게”(「나는 추억보다 느리게 간다 . 자전거의 노래를 들어라 2」) 갈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자전거의 길은 언제나 우회한다/ 에움길의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직설이 아닌 다만 은유로 존재한다/ 스치는 바람의 감촉아, 은유로 이루어진 길 위에서/ 길을 잃는다는 건 행복하여라.”(「일 포스티노 . 자전거의 노래를 들어라 3」) “사랑은 늘 고통을 페달 돌려/ 자기를 불 밝힌다/ 자전거의 길을 따라 어떤 이는 와서/ 그 빛으로 인생을 읽고 가기도 하고/ 救援을 읽고 가기도 한다.”(「사랑의 편지 . 자전거의 노래를 들어라 7」) 하지만 유하 시인은 더 이상 시를 쓰지 못하고 “시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꿈”(『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 p.5)만 있다고 고백합니다.
소설가에서 영화감독으로 변신한 이창동처럼, 유하 시인은 이제 영화감독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이야기의 표현 방식을 바꿨습니다. 추억의 행위가 문자 언어보다는 영상 언어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영상 언어와 문자 언어 가운데 무엇이 더 우월한 매개체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야기의 내용과 표현 방식에 따라 매체의 형식이 달라질 것입니다. 어떤 내용을 어떤 방식으로 전달할 것인지는 모든 이야기꾼들이 고민해야 할 문제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과연 어떤 틀에 담아 어떤 방식으로 전달할 것인지, 이 시대의 교회는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추억한다는 것은 그저 생각 안에서 기억한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기억은 단순한 경축(celebration)이 아닙니다. 진정한 기억은 재현(representation)입니다. 기억은 구체적 삶 안에서 재현되고 경축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교리와 신학의 방식으로 기억하고 전례의 방식으로 경축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닮은 모습과 태도로,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했던 그 일을 하는 것이 진정한 기억이며 재현입니다. 유하의 시를 읽으며, 복음의 선포와 전달 방식에 대해, 예수님을 진정으로 기억하고 재현하는 일에 대해 생각합니다.
[월간빛, 2019년 1월호, 정희완 요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조직신학 교수, 안동교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