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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신부: 있지도 않은 문장은 아름답고

배델창 2019. 8. 21. 11:24



[시(詩) 읽어주는 신부] “있지도 않은 문장은 아름답고”

 

 

안식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몇 군데의 본당에서 신자들과 함께 미사 드릴 기회가 있었습니다. 신학교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신앙의 현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물론 본당 신부로서 오래 함께 살면서 지켜보는 것과는 다른 느낌일 것입니다. 잠깐의 피상적인 접촉으로 현장의 속내를 다 파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언뜻 본 신앙의 현주소는 조금 슬펐습니다. 현대 사회의 고령화 추세는 어쩔 수 없는 흐름이지만 신앙 현장에서의 고령화의 진도는 사회적 흐름을 훨씬 앞서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평화방송의 주일미사 중계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일 교중미사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구성 분포도는 압도적으로 노년 세대 중심입니다. 청년미사, 학생미사, 어린이미사의 참여자는 눈에 띄게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가톨릭 신앙생활의 참여 분포도 안에 세대 간의 불균형이 심각한 것 같습니다. 교회 안에 젊은 세대가 줄어든다는 위기의식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뭔지 모를 답답함이 밀려왔습니다. 단순한 교회 구성원의 고령화 문제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교회 공동체가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인간이 죽음과 삶의 어쩔 수 없는 문제들을 안고 살아가는 한, 종교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속화 과정을 둘러싼 현대 학자들의 논쟁을 여기서 언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찰스 테일러가 『세속 시대』(A Secular Age)라는 현대의 고전에서 예견했듯이, 사람들이 종교를 실천하는 방식은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종교적 실천의 방식이란 하나의 종교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표현하고 수행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즉 교리와 전례와 종교 생활 전체를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의 종교적 실천에 익숙했던 세대들은 아마도 죽는 날까지 그 방식으로 종교를 실천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지금의 종교적 실천에 익숙한 세대가 사라지면 교회가 위기를 맞이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그때에는 성령께서 새로운 방식으로 교회를 이끌어 갈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교회 구성원들이 미래 세대의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고 그들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표현하고 수행하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교회는 꽤 오래 다시 침체의 과정을 겪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살짝 들었습니다. 지금의 교회 중심 세대는 여전히 사회의 중심 세대입니다. 교회의 중심 세대가 비록 고령화의 과정으로 접어들었지만 아직 자본과 지위에 있어서 주도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별다른 위기의식을 못 느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미래 세대의 신앙을 위해 교회는 새로운 종교적 실천의 방식을 적극적이고 선도적으로 찾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이제니 시인(1972년생)은 기존의 시적 문법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시를 쓰는 작가입니다. 소설가가 되고 싶어 글을 쓰다가 조금 늦은 나이(2008년)에 시인으로 데뷔했습니다. 이제니 시인은 개별 단어와 고립된 문장들이 뿜어내는 깨달음의 의미(일종의 잠언적 의미)를 추구하기보다는 단어와 문장의 다양한 배치와 배열을 통해 의미적 변주를 추구합니다. 이제니의 시에는 단어와 문장이 관습적인 자리와 형식을 벗어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제니 시인의 시를 읽는 일은 다양한 변주의 문장적 진술들 속에서 암호를 찾는 느낌입니다. 생이라는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 시인은 다양한 리듬의 소리를 들려줍니다. 시인 스스로 고백하듯이, 이제니 시인에게 시는 “의미 너머의 어떤 것”이며 “문자로 된 리듬”입니다.(이제니의 시론, 「풀을 따라 걷는 마음」, 계간 『파란』, 2016 여름호) 이제니의 시는 “리듬의 프락시스, 목소리의 여행”이며, 이제니 시인은 “시의 미래를 목도하고자 제 자신을 걸고서 두려운 내기를 하는 시인”입니다.(조재룡) 발랄한 감각적 언어들과 물결치듯 흐르는 문장들로 구성된 이제니의 시는 독특한 호소력으로 시인의 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이제니 시인의 시는 소리 내어 읽어야 합니다. 읽다 보면 나직한 독백의 소리와 때때로 다양한 화음의 노래를 들을 수 있습니다. 낱말과 문장의 리듬 속에서 생의 비의가 조금씩 드러나는 듯한 느낌입니다. 두 번째 시집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문학과지성사, 2014)에 실린 일종의 자신의 시적 선언문 같은 연작시들(「나선의 감각」) 속에서 시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네 말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어딘가에 먼저 가닿는 것은 네가 전하는 의미보다는 네가 내뱉은 음들 고유의 성조와 고저와 장단이다. 바로 너의 내면이다. 호흡이다. 울림이다. 감정이다. 호소이다. 너는 네 속에서 들려오는 그 모든 소리들을 기록한다. 누군가의 입을 빌려 말하듯 너는 그 무수한 목소리들을 받아 적는다. 이것이 바로 내 시다.”(「나선의 감각-음」)

 

이제니 시인의 중심 화두는 ‘언어’와 ‘슬픔’ 같습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생각하고 소통합니다. 언어와 그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과의 관계는 동일성과 차이입니다. 인간 사유에 있어서 언어는 가능성이며 동시에 한계입니다. 언어와 지시대상 간의 차이와 한계 때문에 개별 단어(낱말)와 고립된 한 개의 문장은 하나의 동일한 의미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단어는 문장 속에서, 문장은 더 큰 문맥 속에서 의미가 늘 변주됩니다. 이제니 시인은 단어와 문장을 고정된 의미에 묶어두지 않고 자유롭게 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찾으려 합니다. 이제니의 시는 “독백. 끊어 쓰기. 도상학적 글쓰기로부터 달아나기. 내뱉는 말을 주어 삼키기. 주워 삼킨 말을 다시 내뱉기. 반복되는 목소리. 도처에서 떠도는 소리와 색깔들. 명사를 대신하는 부사와 형용사.”(「풀을 따라 걷는 마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반복되고 변주되는 낱말들과 리듬처럼 흐르는 문장들을 통해 시인은 생의 슬픔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어제부터 슬픔에 대해서 말하지 않기로 했”(「분홍 설탕 코끼리」)지만 “체온이라는 말에는 어떤 슬픈 온도가 만져진다”(「블랭크 하치」)고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매일매일 슬픈 것을 본다… 이제 우리는 영영 슬프게 되었다.”(「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아름다운 것은 슬픈 것. 슬픈 것은 아름다운 것.”(「마지막은 왼손으로」) 어쩌면 그 사실이 생의 슬프고 아름다운 역설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시인에게 시는 “문장으로 연습해보는 어떤 종류의 감정”이며 “위로받고 싶은 모종의 마음”입니다.(「모퉁이를 돌다」) “멀리 있는 것들의 이름을 마음으로 부를 때/ 나는 슬픈가 나는 위안이 필요한가.”(「아마도 아프리카」) “슬픔의 순간에도 운율만은 잊지 않았지.”(「네이키드 하이패션 소년의 작별 인사」)

 

아마도 시인들은 본성적으로 슬픔에 민감한 존재인가 봅니다. 어쩌면 슬픔에 민감하지 않으면 시인이 될 수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첫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창비, 2010)에서부터 이제니 시인은 “의미에 앞서 어떤 말의 에너지, 음성적인 결이 잘 흐르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추면서 생의 슬픔을 나지막한 소리로 읊고 있습니다. 이제니의 시는 다양한 낱말들과 문장적 변주에 의한 긴 서술이어서 뭔가 확연한 느낌으로 잘 다가오지 않고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이제니의 시집은 전체로 읽을 때 다가오는 어떤 감각적 느낌과 인식적 깨달음(?)이 있습니다. 『아마도 아프리카』에 실린 시들 역시 다양한 변주와 리듬 속에서 삶에 대한 어떤 편린적 성찰들을 슬그머니 슬쩍슬쩍 담고 있습니다. 시집에 실린 시들의 순서에 따라 그 편린들을 연결해도 하나의 시가 되는 느낌입니다.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다.”(「페루」) “오늘부터 나는 반성하지 않을 테다. 오늘부터 나는 반성을 반성하지 않을 테다.”(「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너는 긴 인생을 틀린 맞춤법으로 살았고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었다.”(「밤의 공벌레」) “이제 남은 일은 말하지 못한 말들을 삼키거나 뜻 없는 문장들의 뜻없는 의미를 뒤늦게 알아차리는 일뿐.”(「공원의 두이」) “매순간 초연해지길 바라지만 혁명을 하기엔 책을 너무 많이 읽었고 풍경을 읊기엔 양심이 허락하지 않고.”(「코다의 노래」) “어제 익힌 불안의 자세를 복습하며 한 시절에 대해 생각한다…

 

한 시절을 훑느라 지문이 다 닳았다. 먼지 같은 사람과 먼지 같은 시간 속에서 먼지 같은 말을 주고받고 먼지 같이 지워지다 먼지 같이 죽어가겠지. 나는 이 불모의 나날이 마음에 든다.”(「별 시대의 아움」) “무료하진 않았다. 무엇을 하든 시간은 제 걸음 위에 머무는 법이 없으니까.”(「오리와 나」) “모든 불행은 돌이켜 생각하거나 앞질러 생각하는 자들의 몫이다.”(「검버섯」) “누구든 좋으니 단 한 사람이라도/ 나를 아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갈색의 책」) “우리의 대답은 언제나 질문으로 시작해서 질문으로 끝나지. 청춘은 다 고아지. 헛된 비유의 문장들을 이마에 새기지. 어디에도 소용없는 문장들이 쌓여만 가지. 위안 없는 사물들의 이름으로 시간을 견디지.”(「발 없는 새」)

 

이제니 시인의 개인적 고통의 시간에 대한 체험이 담긴 두번째 시집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에도 여전히 문장적 실험들 속에서 생의 슬픔에 대한 시인의 감각적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죽음은 묵음과 가깝다. 정오와 자정은 가깝다. 얼음과 울음은 가깝다. 밤과 몸은 가깝다.”(「달과 부엉이」) “구원이 필요한 순간에 가장 부족한 것은 구원이라 생각하는 동안,”(「음지와 양지의 판다」) “첫 문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슬픔을 드러낼 수 있는. 슬픔을 어루만질 수 있는./ 고통의 고통 중의 잠든 눈꺼풀 속에서.”(「분실된 기록」)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해 미워하듯이.”(「수풀로 이파리로」) “오늘의 기억은 내일 또다시 정교하게 수정된다.”(「계피의 맛」) “틀린 맞춤법이 언제나 슬프고 좋았다.”(「잔디는 유일해진다」)고 시인은 리듬처럼 읊조리고 있습니다. 두 번째 시집에 실린 “눈을 감는다. 무언가를 보기 위해. 무언가를 듣기 위해.”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모르는 사람 모르게」라는 시를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조금 긴 시입니다만 묘한 리듬과 뭔지 모를 슬픈 정조의 서술이 매력적입니다. 자유로운 의식의 흐름을 서술하는 이인성의 소설처럼, 하지만 이인성의 소설처럼 어렵지는 않은, 이제니 시인의 시가 갖는 독특한 흐름과 아름답고 감각적인 숨결이 느껴질 것입니다.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그 믿음들 사이의 균열을. 그 틈새들 속에서 흘러넘치는 물방울의 표면을 읽어 내려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읽고 싶은. 내가 쓰고 싶은. 단 한 줄의 문장이라고 생각하면서.”(「나선의 감각-역양」) 이제니 시인은 자신의 시 세계를 펼쳐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흰 집 건너 흰 집이 있어 살아가는 냄새를 희미하게 풍기고 있다. 거룩한 말은 이 종이에 어울리지 않아서 나 자신도 읽지 못하도록 흘려서 쓴다. 하늘은 어둡고. 바닥은 무겁고. 나는 다시는 오지 않는 사람을 가지게 되었고. 너는 말할 수 없는 말을 내뱉고 읽히지 않는 문장이 되었다. 낮잠에서 깨어나 문득 울음을 터뜨리는 유년의 얼굴로. 마음과 물질 사이에서 서성이는 눈빛으로. 인간 저 너머의 음역으로 움직이고 움직이면서.

 

돌보는 말과 돌아보는 말 사이에서

밀리는 마음과 밀어내는 마음 사이에서

 

사랑받은 적 없는 사람이 모르는 사이 하나하나 감정을 잃어버리듯이. 한밤의 고양이와 친해진 것은 어느 결에 사람을 저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냥 사람이라는 말. 그저 사랑이라는 말. 그러니 너는 마음 놓고 울어라. 그러니 너는 마음 놓고 네 자신으로 존재하여라. 두드리면 비춰 볼 수 있는 물처럼. 물은 단단한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남겨진 것 이후를 비추고 있었다.

 

세 번째 시집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문학과지성사, 2019)에 첫 번째로 실린 「남겨진 것 이후에」라는 시의 전문입니다. 언어적 유희와 문장적 실험을 더 깊게 밀어붙인, 세 번째 시집에서도 시인은 여전히 생의 슬픔을 ‘흘려 쓰는’ 방식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제니 시인의 시적 실험 속에서 시 쓰기와 삶 읽기가 수렴되는 듯한 느낌입니다. 이제니의 시 안에는 여전히 언어적 실험과 생의 슬픔이 서로 교직되어 있습니다. “멀리서 오는 것은 슬픔”(「구름에서 영원까지」)이기에 “뜻 없이 마음 없이 흐르듯 흐르듯 건너간다고”(「빗나가고 빗나가는 빛나는 삶」) 시인은 독백하듯 말합니다. “남아 있는 것은 어두운 생각뿐이다. 무엇인가를 밝혀내기 위해 이 문장들을 쓰고 있다… 오래된 목소리를 상기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배열이 필요하다.”(「지금 우리가 언어로 말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 “사라져간 것들에게 익숙해지기까지는 신중하게 배열되고 조합된 감정이 필요”(「네 자신을 걸어둔 곳이 너의 집이다」) 하다고 시인은 생각합니다. “무언가 모르는 것이 풍경 속으로 스며들고 있”(「있었던 것이 있었던 곳에는 있었던 것이 있었던 것처럼 있었고」)고 “낯선 것일수록 감각을 예민하게 일깨울 수 있”기에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연습을” 한다고 시인은 고백합니다.(「돌을 만지는 심정으로 당신을 만지고」) 때론 “꿈꾸던 얼굴을 갖고 싶어 거짓말의 형식을 차용”(「안개 속을 걸어가면 밤이 우리를 이끌었고」)하기도 하며, “자신의 표정을 제대로 들여다보기 위해서 다른 누군가의 문장을 인용하는 무수한 얼굴을 생각”(「거울을 통해 어렴풋이」)하기도 합니다. 이제니 시인에게 시를 쓰는 일은 “소리 아닌 소리로 발음되기를 바라면서”(「발화 연습 문장-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문장을 흘려 쓰는 일이며, “누군가가 내뱉은 말이 나의 입술을 빌려 세상으로 흘러나”오는 일이며, 언젠가 내가 했던 말이 누군가의 목소리를 덧입은 채로 흩어지는” 일입니다.(「발화 연습 문장-석양이 지는 쪽으로」) 아마도 이제니 시인에게 시는 소리를 통해 공감으로 나아가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흐느끼는 것은 내가 아닌데/ 내가 흐느끼고 있는 것만 같았다.”(「발화 연습 문장-모두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새로운 형식의 시도가 반드시 새로운 내용을 담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형식과 내용은 함께 갑니다. 새로운 방식을 찾아내지 못하면 새로운 내용(의미)을 담지 못할 것입니다. 관습적이고 익숙한 것에만 집착하는 모습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쇄신하게 하는 성령의 바람을 놓치는 어리석음으로 작동될 위험이 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이제니 시인의 가장 최근의 시집인 『있지도 않은 문장은 아름답고』(현대문학, 2019)에 실린 「있지도 않은 문장은 아름답고」라는 표제시에 재미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있지도 않는 문장은 아름답고 노인의 마음을 생각한다… 노인의 마음으로 거리를 걸으면 있지도 않은 문장은 더욱더 아름다워지고.”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며 “전통은 구속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토대”라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아마도 참다운 전통(지혜, 노인)은 새로운 세대(미래 세대)의 가능성과 아름다움을 더 확장할 것입니다.

 

전례의 모습이 신앙의 현실입니다. 전례가 형식적이면 신앙도 형식적이 됩니다. 전례에 기쁨이 가득하면 신앙도 기쁨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탁월한 전례학자 에드워드 폴리(Edward Foley) 신부는 최근의 저서(Mighty Stories, Dangerous Rituals) 안에서 전례는 하느님의 목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를 함께 담고 있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오늘의 전례 안에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가 흔히 부재하기 때문에 전례가 영혼을 잃어버린 모습으로 자주 드러난다고 폴리 신부는 정직하게 고백합니다. 전례 변화와 쇄신 역시 오늘의 교회의 큰 숙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새로운 시적 실험을 통해 문장에 대한 새로운 감각과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주는 이제니의 시를 읽으며, 오늘의 교회가 신앙을 고백하고 표현하고 수행하는 방식에 대한 변화와 쇄신을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면 하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월간빛, 2019년 8월호, 정희완 요한 신부(안동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