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어주는 신부: 조심스러운 이해
[시(詩) 읽어주는 신부] 조심스러운 이해
타인의 사유와 감정과 정서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아마도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거창하게 말해서 우리는 인간의 보편성과 문명의 공통성을 토대로 타자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많은 요소들(인종과 민족, 문화와 풍속, 성별과 세대, 환경과 처지)이 타자를 이해하는데 걸림돌로 작동됩니다. 특히 같은 공간적 배경과 문화적 환경 속에 살아간다 해도 성별과 세대의 차이는 사유와 감정과 정서라는 측면에서 다름을 낳습니다. 이렇게 말해 놓고 보니 무언가 딱딱하고 추상적인 느낌입니다. 그냥 쉽게 말하면 늙은 남자로 살아가는 저는 여성과 젊은 세대의 사유와 감정과 정서를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젊은 여성의 사유와 감정과 정서를 이해하는 일이 가장 조심스럽습니다.
남자로 살아가는 저에게 여성의 사유와 감정과 정서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게 해 준 것은 은희경의 소설과 김선우의 시였습니다. 첫 소설 『새의 선물』에서부터 가장 최근의 소설 『빛의 과거』에 이르기까지 은희경의 소설은 여성의 시선으로 대상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예리하게 분석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여성의 사유와 인식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 저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김선우의 시를 통해 여성의 감정과 욕망과 정서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조금 훔쳐보았습니다. 문학의 영역 밖에서도 조한혜정 선생과 정희진 선생의 글은 인문적 사유의 깊이와 혜안적 통찰이라는 측면에서 늘 저를 압도했고 많은 것들을 배우게 했습니다. 남성으로 살아가면서 무의식적으로 몸에 배어있는 제 자신의 기득권적 인식과 습성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자신의 방식으로 삶을 수행해내고 있는 여성들을 통해서 우리 생의 또 다른 절반의 차원에 대해 이해를 넓히려고 노력 중입니다.
사람은 자기 세대를 이해하기가 그래도 쉽습니다. 동시대를 살아 왔고 살아가기 때문에 이해와 공감의 폭이 가장 넓습니다. 앞선 세대를 이해하기는 비교적 덜 어렵습니다. 앞선 세대는 이미 자신의 사유와 감정과 정서를 텍스트와 문화 속에 많이 표현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아직 자신의 사유와 감정과 정서를 표현할 문화적 수단을 많이 갖지 못한 젊은 세대를 이해하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물론 요즘은 인터넷과 다양한 매개 수단을 통해 모든 세대 사람은 저 나름의 표현 수단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사회의 말과 권력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 사회의 중심 세대가 갖는 문화적 기득권 때문에 세대 간의 이해와 소통에는 늘 어려움이 발생합니다. 기성 세대는 젊은 세대를 자기 세대의 잣대로 판단하는 경향을 자주 보입니다. 젊은 세대를 이해하려고 할 때 이성과 논리의 결을 따르는 사유의 측면은 그래도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젊은 세대의 감정과 정서는 사유의 측면보다 이해하기 더 어렵습니다. 비록 사유와 감정과 정서는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말입니다. 당대를 살아간다 해도 세대 간의 사유와 감정과 정서는 확실히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이야기가 추상적이고 복잡해졌습니다. 단순하게 말해서 늙은 세대인 저는 젊은 세대의 감정과 정서를 읽어내기가 여전히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같은 세대 여성들의 담론과 글쓰기를 많이 접하지 못한 구세대인 저는, 젊은 여성 시인인 박연준(1980년생)의 시를 읽고 그 느낌을 쓰기가 무척 힘들었다는 변명을 하고 싶어서 너절하게 서두를 길게 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박연준의 시는 조금 낯설고 생소해서 오히려 좋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그의 시에 대한 제 이해와 생각을 적으려고 하니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1970년대 세대의 여성 시인까지는 그래도 어떻게든 이해해 볼 수 있는데, 그 이후 세대의 여성 시인의 사유와 감정과 정서는 제 이해 영역의 밖이었습니다. 문보영 시인(1992년생)의 시집을 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외적 시인과 시도 있습니다. 201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원하 시인(1989년생)의 시,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같은 시는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물론 제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좋지 않은 시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잘 이해하지 못한 시를 통해 새로운 세대의 사유와 감정과 정서를 배웁니다. 배움에는 그만큼 노력과 지불비용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첫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창비, 2007)과 두 번째 시집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문학동네, 2012)에서 박연준 시인은 ‘아버지’라는 대상과 ‘시쓰기’라는 화두를 매개로 시적 상상을 전개하는 경향을 자주 보입니다. 24살의 띠동갑 차이의 젊은 아버지라는 존재는 시인에게 애증의 대상인 것처럼 보입니다. 알코올 중독증과 우울증을 앓고 있는 중년의 아버지를 바라보는 20대 처녀의 막막한 일상과 어린 시절의 가난한 기억이 박연준 시인의 초기 시 곳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주 눈을 뒤집어까고 주먹으로 방바닥을 두드렸다/ 땅바닥에선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화려하게 발기한 소주병들이 집 안 어디에서나/ 서로 부둥켜안고 있었다/ ……// 우리는 모두 흙속에 있었고, 밖에서는 간혹 꽃이 핀다고도 했다.”(「싹이 난 감자」) “아버지를 병원에 걸어놓고 나왔다/ 얼굴이 간지럽다//……/ 아버지는 나를 잠깐 보더니/ 처제, 하고 불렀다.”(「뱀이 된 아버지」) 어린 시절부터 각별한 관계를 맺고 살아온 아버지, 그 아버지는 노년으로 가지도 못하고 오랜 병원 생활 끝에 56살의 젊은 나이로 삶을 마감합니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시인이 씨름해야 할 대상이며 시를 촉발시키는 매개의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의 생에서 씨름해야 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고통이면서 동시에 축복입니다. 시도 그렇고 삶도 그렇습니다. 싸워야 할 대상과 매개를 놓쳐 버리거나 잃어버릴 때 역설적으로 시와 삶은 오히려 느슨해 집니다. 슬픈 역설이지만 전장(戰場)에서 발생하는 슬픔과 고통은 창작의 토대가 됩니다. “아버지는 戰場이었다. 나는 그가 뽑아 든 무딘 칼.”(『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시인의 말에서)
감당해야 할 일상의 무게가 버거운 시인에게 ‘시쓰기’는 탈출구요 해방구인 것 같습니다. “스물다섯 때, 시가 몸살나게 좋았다. 그랬으니 신생아처럼 하루 스무 시간 잠으로 보내는, 아버지 발아래 엎드려 자꾸만 연필을 들었다. 나는 아버지의 시든 발목, 혈관 깊숙이 빨대를 꽂아, 공들여 시를 뽑아먹었다.”(『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시인의 말에서) 삶의 아픈 현실에서 발생하는 시는 꽃처럼 피는 것이라기보다는 똥처럼 떨어지는 것이라고 시인은 고백합니다. “고요 속에는/개줄에 목이 묶여 기어가는 아버지와/ 365일 하혈하는 병든 밤과/ 부지런히 늪을 짓는 거미가 산다/ 내 눈 속에는 아직 씌어지지 않은 시들,/ 그 꾸물꾸물, 징그럽게 살아 있는 푸른 독으로 거품이 일고.”(「시를 쓴다」) “시가 똥처럼 떨어진다/ 낳아놓은 똥은 죽은 걸까, 산 걸까?// ……// 그런데 너, 내가 더럽니?/ 내 시가 더럽니?”(「詩」) 젊은 시절의 시인에게 시는 어쩔 수 없이 지르는 “비명” 같은 것입니다. “누군가의 숨죽인 흐느낌”(「환청」)이며 “몸부림을 치며 흐느끼는 외침”(「나비-마이크에 매달려 독백으로」)이며 “안개 속 한줄기 비명”(「겨울은 활활 나를 태우고」)입니다. 시를 쓰면서 시인은 이제 더 이상 울지 않고 그저 자신의 삶을 살겠다고 선언합니다.
이제 나는 남자와 자고 나서 홀로 걷는 새벽길 여린 풀잎들, 기울어지는 고개를 마주하고도 울지 않아요 공원 바닥에 커피우유, 그 모래 빛 눈물을 흩뿌리며 이게 나였으면, 이게 나였으면! 하고 장난질도 안쳐요 더 이상 날아가는 초승달 잡으려고 손을 내뻗지도 걸어가는 꿈을 쫓아 신발 끈을 묶지도 오렌지주스가 시큼하다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아요, 나는 무럭무럭 늙느라
케이크 위에 내 건조한 몸을 찔러 넣고 싶어요 조명을 끄고 누군가 내 머리칼에 불을 붙이면 경건하게 타들어 갈지도 늙은 봄을 위해 박수를 치는 관객들이 보일지도 몰라요, 모르겠어요
추억은 칼과 같아 반짝 하며 나를 찌르겠죠 그러면 나는 흐르는 내 생리 혈을 손에 묻혀 속살 구석구석에 붉은 도장을 찍으며 혼자 놀래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새벽길들이 내 몸에 흘러와 머물지 모르죠, 해바라기들이 모가지를 꺾는 가을도 궁금해하며 몇 번은 내 안부를 묻겠죠 그러나 이제 나는 멍든 새벽길, 휘어진 계단에서 늙은 신문배달원과 마주쳐도 울지 않아요
「얼음을 주세요」라는 시의 전문입니다. 박연준 시인을 문단에 등단하게 한 첫 시입니다. 20대 중반의 젊은 여성이 약간 조로(早老)의 포즈를 취하며 당당하면서도 담담하게 자기 생에 대해 선포하는 듯한 시입니다. 스물다섯 살 여성의 선언으로 보기에는 너무 서늘한 느낌입니다. “나는 멍든 심장을 쥐고 시를 쓴다/ 시퍼런 독을 짜내 멍을 키운다”(「시를 쓴다」)고 고백하는 시인이기에, 그의 시적 진술이 단순히 젊은 날의 치기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씨름해야 할 애증의 존재가, 가난하고 고단한 일상이 시인을 일찍부터 내공이 많은 고수로 성장하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조금씩, 넓어지는 감옥에 갇히는 일이라고/ 바람이 불고, 벽이 자란다.”(「늙은 연둣빛, 터널」) “오래 생각하면 어둠도 늙는다.”(「연애의 그늘」) 조금 엉뚱한 생각이지만 저에게, 박연준 시인은 삶의 비의를 일찍부터 엿본 조숙한 여성의 이미지라기보다는 어린 시절부터 삶의 신산함을 경험한 조로한 여성이라는 이미지로 읽힙니다. 당연히 몸의 늙음이 아니라 마음의 늙음 말입니다. 마음이 일찍 늙었다 해도 청춘으로 살아가는 이상, 사랑과 애인은 누구에게나 필생의 과제입니다. 일상의 현실은 때때로 “사랑은 어느 곳에서부터 끊겼을까?/ 끊긴 곳에서 삐져나온 실밥들에게/ 이제 그만 무뎌지라고, 속삭”(「창백한 잠」)이지만 마음의 속내는 “애인은 내내 화두”(「겨울의 고도」)인 것이 청춘의 정직한 모습입니다. “오늘밤도 딸들은 구두 뒤축으로 아버지를 뭉개죽이고/ 음탕한 애인들을 찾아헤맨다.”(「밤 11시」)
세 번째 시집 『베누스 푸디카』(창비, 2017)와 네 번째 시집 『밤, 비, 뱀』(현대문학, 2019)에서 박연준 시인의 초점은 조금씩 이동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아버지라는 대상은 여전히 짙은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죽기 일주일 전/ 당신은 이가 네 개 부러졌다고 했지/ 나는 모르는 척했지만// 일주일을 더 살다 당신이 아주,/ 갔을 때/ 한동안 아무것도// 아무것도 마시고 싶지 않았다.”(「그릇」) “때때로 나는/ 죽은 이와 대화한다/ 아버지가 ‘죽은 자의 목록’에 들어간 이후.”(「사랑은 죽은 이빨 . 가족의 초상」) 또한 여전히 슬픔이 시의 토대입니다. “이미 태어난 슬픔은 악다구니를 피해/ 여전히 질투 나게 말랑한 누군가의 생활에 뿌리를 내리고/ 붉고 끈덕지게 새끼를 치고/ 나는 멀리에서 가벼워진 몸,/ 이라 생각하며/ 포기, 포기, 포기하겠다고 눈을 감지만// ……// 도망가봤자 소용없어,/ 아름다운 그늘!”(「술래는 슬픔을 포기하면 안된다」) 하지만 이제 시인의 주된 시적 관심은 욕망과 감정이라는 흔들리는 물결 속에서 자신을 찾는 일입니다. “스물아홉의 젊은 아버지가 술 취해 나를 찾고,/ 나는 다섯 살.”(「베누스 푸디카 3 . 기억의 탄생」) “꿈, 사랑, 희망은 내가 외운 표음문자/ 습기, 죄의식, 겨우 되찾은 목소리, 가느다란 시는/ 내가 체득한 시간의 성격.”(「베누스 푸디카」) 박연준 시인은 담담하게 고백합니다. “시를 쓸 때는 노력하지 않는다. 그냥 내가 된다. 꼭 맞는 옷을 입고, 혹은 벗고, 섹스하는 것 같다”(『밤, 비, 뱀』에 실린 에세이, “괴팍한 디제이의 음악 일기”에서)고 말입니다. “시를 쓸 때 내 얼굴엔// 밤,/ 비,/ 뱀이 내리고,”(「밤의 식물원」) “슬픔을 깔고 앉”(「의자 열 개가 있는 창가」)으며 시를 쓴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밤, 비, 뱀의 이미지는 복잡한 설명이 없어도 우리는 그것이 어떤 것들을 지시하는지 잘 압니다. 어둠과 고통, 눈물과 슬픔, 유혹과 욕망, 하지만 시인은 그 정형화된 지시관계를 넘어 또 다른 의미로 확장시킵니다. “작고 굵은 것을 잉태해,/ 밤이 말한다/ 비탈길을 타고 도망가,/ 뱀이 말한다/ 모든 것에 스민 후 재빨리 사라지렴,/ 비가 말한다.”(「밤의 식물원」)
세월이 흐른다고 해서 사람의 사유와 감정과 정서의 폭이 자동적으로 확대되지는 않습니다. 지속적인 공부와 일상의 수행을 통해서 사람은 성장합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시집에서 박연준 시인의 시적 시선은 더 깊고 확장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시선의 확장은 독자에게 이해를 위한 더 많은 노력을 요청합니다. 저에게는 처음의 두 시집보다 나중의 두 시집이 이해하기 더 어려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람의 혀 . 십이월에 부는 바람」 같은 시 안에서 시인이 보여주는, 감각과 사유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상상력과 어둡지만 발랄한 정서의 직조능력은 찬탄을 불러일으킵니다. 삶에 대한 시인의 쓸쓸한 통찰은 또 얼마나 눈부신지 모릅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마음에 한 장씩 이불이 깔리는 일/ 어느날 한꺼번에 다리를 잃어도/ 몸통을 핥으며 살 궁리를 하는 것.”(「침대 2 . 시간들」) “늙는다는 것은/ 몸과 마음과 시간이 한데 모여/ 경화를 위해 엎드리는 일.”(「전동차 안에서」) “‘당신’이라는 말 속엔 작은 신이 살고// 너무 작아서//당신은 자주 사라지나?”(「자꾸 돌아오는 이별」) “죽을 때 미끄럼틀 아래에서 녹는 건 나/ 지나간 것들과 조우하겠지/ 모든 날은 아니고/ 어떤 날들/ 나였던 나들이 눈송이처럼 쌓이고.”(「촉觸」)
2015년 박연준 시인은 25살 나이 차이가 나는 장석주 시인과 결혼합니다. 이 부부 시인은 다양한 글쓰기의 시도를 통해 서로의 지평을 확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 남편의 상관성을 읽고 싶어 하는, 상투적이고 삿된 호기심이 살짝 들었습니다. 하지만 시 속에 드러나는 삶의 에피소드들을 통해 삶의 인과관계를 추적하고 추측하는 것은 어리석고 주제 넘는 짓입니다. 나아가 그것은 일방적이고 지독한 폭력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말과 권력을 남성들이 독점했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습니다. 오늘의 여성들은 자기의 말을 하고 자신의 시선으로 글을 씁니다. 말과 글의 영역에서는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아직 권력의 자리는 여전히 남성들이 대부분 차지하고 있지만 그 격차의 간격이 좁아지리라 기대합니다. 세상은 이렇게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데, 교회는 아직도 여전히 남성중심주의가 세속보다 더 강한 것 같은 인상입니다. 이 시대의 교회는 여성들에게서 더 많이 배워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박연준의 시를 읽으며 합니다.
[월간빛, 2019년 11월호, 정희완 요한 신부(안동교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