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어주는 신부: 메모가 시가 되고 울음이 되고 기도가 되는…
[시(詩) 읽어주는 신부] 메모가 시가 되고 울음이 되고 기도가 되는…
자연은 색깔로 자신을 드러내고 인간은 표정으로 자신을 표현합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시간의 흐름을 색깔로 보여줍니다. 제가 사는 집 앞의 작은 산등성이의 나무들이 연한 갈색으로 변해갑니다. 얼마 후에는 앙상한 가지의 잿빛 모습으로 서 있으리라는 걸 예감합니다. 여름날의 그 짙은 푸르름이 엊그제 같습니다. 이렇게 또 시간은 늙음으로 가고 죽음으로 갑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흡수하는 위력을 가졌습니다. 죽음 앞에서 다른 그 어떤 것도 힘을 갖지 못합니다. 사랑, 갈등, 싸움, 분노, 미움 등 우리 생의 그 많은 감정과 숱한 일도 죽음 앞에서 다 부질없는 것이 됩니다. 죽음은 가장 강력한 시선입니다. 죽음이라는 관점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게 되면,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시시하게 여겨지고 불가능해 보입니다. 우리는 가끔 죽음을 의식하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죽음이 갖는 무서운 자장력(磁場力)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아니 죽음에 대한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피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우리는, 죽음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이기에 또는 시간적으로 먼 미래의 일이기에 안도와 위안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사실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경험하는 죽음은 언제나 타자의 죽음입니다. 죽어가는 사람 또는 죽은 사람과 우리 자신과의 거리가 죽음을 체험하는 강도와 밀도를 결정합니다. 그 모든 것은 간접경험일 뿐입니다. 체험의 강도는 시간 속에서 언제나 옅어져갑니다.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이 주는 충격도 흐르는 시간 속에서 견뎌낼 수 있는 만큼으로 변해갑니다. 죽음은 분명 우리에게 엄혹한 실재(reality)이지만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무의식적 도피와 시간 속의 망각 덕분에 죽음의 강력한 힘에서 벗어납니다.
어쩔 수 없이 죽음의 영향권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건과 사고에 의한 예기치 못한 죽음은 당사자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늙어 자연스럽게 생을 마감하는 사람은 비록 그것 역시 아쉬움은 남겠지만 당사자의 체념과 수용이 그래도 쉬울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환경과 운명에 의해 죽음이 조금은 분명하게 예견되어 있을 때 그 살아있는 동안의 시간 속에서 죽음은 강력한 힘으로 작동 할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실재를 생생하게 예감하며 살아가야 하는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리적 풍경을 바라보는 일은 힘들고 슬픈 일입니다. 물론 그 운명에 처해 있는 당사자의 힘듦과 슬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말입니다. 죽음으로의 여정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담담하게(?) 응시하고 서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허수경 시인의 유고집 『가기 전에 쓰는 글들』(난다, 2019), 철학자 김진명의 애도일기 『아침의 피아노』(한겨레출판, 2018), 유명한 무신론자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마지막 유작 『신 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알마, 2014)라는 책이 그런 사람들의 글입니다. 허수경 시인의 마지막 일기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민정이 보내 준 난다 노트 한 권을 꺼내들고/ 나는 쓰기 시작했다./ 몇 편의 시가 나에게 남아 있는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가기 전에 쓸 시가 있다면 쓸 수 있을 것이다./ 내일, 내일 가더라도.”
박서영 시인(1968-2018)의 시집을 읽으면서 허수경 시인의 그 구절이 내내 맴돌았습니다. 박서영 시인은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시인이 아닙니다. 문학계 안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은 시인도 아닙니다. 살아있는 동안 두 권의 시집이 출간되었고, 올해(2019년) 초에 두 권의 유고시집이 발간되었습니다. 두 권의 유고시집을 읽기 전까지 저는 박서영 시인에 대해 그리 깊은 관심을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두 번째 시집(『좋은 구름』, 실천문학사, 2014)을 읽었고, 그 시집에 실린 「업어준다는 것」이라는 시를 강론과 강의에서 가끔 사용하는 정도의 관심이었습니다. 박서영 시인의 죽음과 박서영 시인의 시를 연결시켜 읽었기 때문에 유고시집에 실린 시들이 깊은 인상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시인과 그의 삶과 그의 시를 늘 연결해서 읽는 저의 시 읽기 방식 때문일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매개는 너무 강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죽음과 연관시켜 읽게 할 위험이 발생합니다. 죽음이라는 강력한 선입관을 갖고 한 시인의 모든 시를 읽는다면, 시인과 시에 대한 예의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 시 읽기를 연재하면서 지금까지 생존 시인만을 다루었습니다. 물론 허수경 시인은 지금 이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허수경 시인에 대해 글을 쓸 때 시인은 생존해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박서영 시인의 유고시집이 주는 강한 느낌은 시인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이야기를 짓는 것은 남겨진 자의 몫”(「잉여들」)입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박서영 시인에 대해 찾아보았습니다. 시인이 어떤 성장과정을 거쳤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습니다. 가난한 환경과 오래 아픈 병력 속에서 시를 쓰는 일이 시인에게 유일한 구원 같았습니다. “시 잡지를 20개 정도 정기구독 했다. 당시 월세 사는 형편에 아기를 돈 주고 맡기고 시 공부하러 다녔다. 죽기살기로 공부하듯이 시를 배우고 썼다. 자다가도 일어나 메모했고 벽에도 메모했다.”(2013.2.18, 경남신문 인터뷰) 병이 재발하고 난 후 시인은 더 끊임없이 메모합니다. 그 메모가 시가 되고, 울음이 되고, 기도가 됩니다. 유고 시집들에 실린 ‘시인의 말’은 박서영 시인의 생각과 감정과 정서를 확연하게 보여줍니다. “우는 짐승과 기도하는 짐승에게서 사랑의 기척을 느끼며!”(『착한 사람이 된다는 건 무섭다』, 걷는 사람, 2019, 시인의 말에서) “죽음만이 찬란하다는 말은 수긍하지 않는다/ 다만 타인들에겐 담담한 비극이 무엇보다 비극적으로/ 내게 헤엄쳐왔을 때/ 죽음을 정교하게 들여다보는 장의사의 심정을 이해한 적 있다// 나는 사랑했고 기꺼이 죽음으로/ 밤물결들이 써내려갈 이야기를 남겼다.”(『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 문학동네, 2019, 시인의 말) 죽음을 강하게 예감한 후에는 더욱 필사적으로 메모하고 시를 씁니다. 두 번째 시인의 말은 「오늘의 믿음」(『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이라는 시와 「달고기와 눈치」(『착한 사람이 된다는 건 무섭다』)라는 시에 동시에 차용됩니다. 이런 겹침은 아마도 시인이 살아있었다면 수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죽기 전까지 그저 온 힘을 다해 메모하고 시를 쓰는 시인의 모습이 상상되어 오히려 쓸쓸하고 슬픈 느낌입니다.
박서영 시인의 첫 시집(『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천년의 시학, 2006) 역시 죽음의 이미지로 가득합니다. 시집 첫 장에 실려 있는 ‘시인의 말’에서 박서영 시인은 자신의 시적 지향을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죽음은 가장 오래 기억해야 할 불멸이다. 김해 고분 박물관을 어슬렁거리며 내가 찾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곳에서 줄곧 아름다운 시간의 복원에 대해 생각했다. 사라지지 않는 죽음.” 시인의 이 서늘한 진술은 그의 운명을 예감하는 듯합니다. “살아가는 일이 화살표 하나를 따라가는 것”(「너에게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시인은, “동네 입구의 전봇대에는 하얀 종이에/ 반듯하게 씌어진 상가喪家→가 붙어 있다/ ……/ 나는 지금 문상 가는 중이 아니다/ 그러나 태어나자마자 이 표식을 따라왔다/ 울면서도 왔고 졸면서도 왔다/ 사랑하면서도 왔고 아프면서도 왔다”(「죽음의 강습소」)고 고백합니다. 시인에게 생의 여정은 “무덤 속으로의 긴 산책”(「무덤 속으로의 긴 산책에 대하여」)입니다. “한때는 나도 무덤 위를/ 마구 뛰어다니며 놀았지요/ 힘껏 무덤을 밟으며 뛰어놀 때는/ 생이 봉긋한 무덤처럼 아름다울 거라 기대했었지요/ ……/ 어린 시절 내가 기다린 것들이/ 그때 태어나지 않고 무덤 속에 있었던 것들이/ 위독한 병病인 줄 까마득히 몰랐지요.”(「봄의 환幻」) 이 구절을 소급해서 다시 읽으며 박서영 시인의 아픈 운명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의 시는 “죽음의 매혹을 기록하는 일”(「여름 저녁을 기록하는 일」)처럼 보입니다. 그의 모든 시는 “사랑과 죽음의 수수께끼를 풀려고”(「그림자가 시간을 옮기는 집」) 하는, 간절하고 울음 섞인 몸부림 같습니다.
예견된 죽음 앞에서 생각과 감정은 복합적이고 굴곡과 변덕의 요동 속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남았고 당신은 떠나는 것/ 어제란 그런 것.”(「미안해요」) “아픈 사람은 아무 곳에서나 통곡할 권리가 있다.”(「통영」) “당분간 무거워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분분히 흩날리는 눈발을 보며/ 당신은 창 문 밖에서 너무 심각하군요.”(「무중력 배아기의 슬픔」) “어머니에겐 미리 말하는 게 좋을 뻔 했어요/ 주치의가 말했다 나는 그날 이후 주치의를 바꾸었다.”(「연인들」) “종이 위에 얼룩을 남기는 문장처럼,/ 흘러가는 운명을 슬슬 쓰다듬어 보는 저녁이야.”(「운명을 슬슬 쓰다듬어 보는 저녁이야」) “사라진다는 것은 문을 열고 나가/ 문 뒤에 영원히 기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다지 멀리 가지도 못하면서/ 너무 멀리 가버린 것들의 차가워진 심장.”(「의자」) “점점 생각이 많아지고 있어/ 아름다움이란 먼 곳에서 되돌아온 헛것이라는 생각.”(「숨겨진 방」) “오전엔 울고 오후엔 모든 걸 잊곤 하는/ ……/ 잠들 때마다 이불이 무덤 같다는 생각을 한다.”(「난로」) “자꾸 흔들리고 자꾸 일렁이는 것들은/ 자신들이 지독히 슬픈 세계라는 걸 알고 있을까.”(「미행」) “운명보다 더 살 수 있을 거라는 늙은 점술가의 말은/ 잣나무와 사과나무 사이에 흔들리는 집을 짓게 한다.”(「거미줄에 걸려 있는 마음」) “생일(生日)과 기일(忌日)이여. 점점 더 멀어져라. 나의 울음과 너의 울음이 다르다.”(「삼월」) 유고시집 도처에 시인의 복잡하고 불안한 심사가 묻어 있습니다. 특히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라는 시집은 사람과 사람 (연인) 간의 사랑에 대한 시집이라기보다는, 서로 잊어가고 있는 시인과 삶의 연인관계에 대한 시집으로 읽힙니다. 사랑했던 삶과의 이별을 노래합니다. 삶을 사랑했지만 이젠 삶을 잊어야만 하는 시인의 실연의 사연이 시집을 읽는 내내 마음 아프게 합니다. “서로에게 익숙해지기 시작할 때 우리는 등을 돌렸다. 이제 내 몸에서 돋아나는 그림자를 이해하기 위해 계절의 밤을 다 소비해야 한다…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홀수의 방」) 삶을 사랑했던 만큼 아픔도 컸을 것입니다. “사랑의 협약 따위에서 알게 된 건, 시간이든 마음이든 커지면 아프게 된다는 것이다.”(「숲속의 집」) “잊게 해달라고 혼자 욕도 해보았다, 정말이지/ 지금 생에서 먼 곳은 어디란 말인가.”(「버스 정류소에 앉아 있는 셋」) 시인에게 시는 “소리죽여 우는”(「입김」) 울음입니다. 예정된 죽음이라는 “지워지지 않는 무늬를 영원히 매달고 울어야 하는 마음”(「키스를 매달고 달리는 버스」)이지만 “나는 불탔다 몸서리치는 언어를 반죽하여/ 입안으로 밀어넣었다/ 아침의 모든 것들과 저녁의 모든 것들과 밤의 모든 것들이/ 곧 몰려올 것이기에 이 악물고 울음을 참았다”(「입술, 죽은 꽃나무 앞에서」)고 시인은 고백합니다. 시인에게 시는 안간힘을 다해 죽음으로 처형된 운명을 견디면서 올리는 간절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생각이 깊어 슬픔이 탯줄처럼 길어지는 사이/ 순천의 한 여관방에서/ 분홍색 목젖에 울음이 매달려 흔들린다/ 한 호흡만 더 건너가자, 생이여.”(「울음의 탄생」)
죽음은 비정합니다. 한 사람의 죽음은 그저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합니다. 타자의 죽음 앞에서 인간은 여전히 이기적이며 계산적입니다. “나는 하늘을 물들일 나의 부피를 알고 있다/ 그것은 매우 작고 작은 하늘의 땅이어서/ 아무도 잃어버린 줄 모를 것이다.”(「종이배를 접지 못하여」) “모든 죽음은 정교하게 다듬어지고/ 남은 사람들은 시계를 보는 습관이 생겼다/ ……/ 장례식에서도 시간의 주유소는 번창하고 있다/ 울음을 뒤덮고 남은 웃음으로 지폐를 세는 손/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뻔뻔함으로/ 시계를 본다.”(「시계수리공의 장례식」) 시인은 그 비정함을 알기에 헛된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누구나 저마다의 작은 바람이 있습니다.
옆구리를 타고 올라가던 능소화가 눈동자를 뚫고 나왔다 마른 가지를 내밀었다 돌의 박물관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진안 마이산에서 본 돌덩이를 파고 들어간 바로 그 능소화 모든 것이 조용히 지나가주지 않는 날들이다 칠월에 꽃 피는 거 보러 가겠다고 엉덩이를 털며 돌아와 깜빡 잊고 살았다 한 해가 지나버렸다 칠월에 능소화가 피었다가 졌겠지 아마, 그날 두고 온 으깨진 시간들이 내 몸에 남아 있었나 보네 잠을 잤다 옆구리를 타고 올라가던 능소화가 방향을 바꾸는 게 느껴졌다 눈알이 빨개졌다 독을 먹은 꽃이었고 울음이었다 습濕의 시절이 다시 돌아온 걸까 마디마디 메마르지 않고 잎들도 꽃들도 무성하라고 눈물이 흐른다 흘러준다 내가 비를 좋아한다는 걸 당신이 잊지 않기를
「능소화」라는 시의 전문입니다. 죽음이 잊는 일이라면 삶은 기억하는(잊지 않는) 일입니다. 어쩌면 죽어가는 사람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라도 조금은 더 오래 이 지상에 남아있기를 바라는지도 모릅니다. 비록 그것이 부질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해도 말입니다. 우리는 살아왔던 모습으로 죽을 것입니다. 살아왔던 방식으로 죽어갈 것입니다. 박서영 시인은 온 힘을 다해 시를 쓰며 살아왔고 시를 쓰며 죽어갔습니다. 삶에 충실했던 사람은 죽음도 아름답게 맞이할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 ‘아름다운’이라는 형용사는 부질없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땅바닥에 떨어져 배 뒤집고 죽어 있는 건/ 다 울고 자신을 버린 매미/ 얼마나 한스럽게 울다 생을 건너갔는지/ 죽어서까지 짓밟힐까 싶어/ 나무뿌리 쪽으로 슬며시 옮겨 주었다.”(「천년 은행나무 슬하에서」) 박서영 시인의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죽음에 대한 예의를 생각합니다. 삶에 대한 예의만큼이나 세상 모든 죽음에 대한 예의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라는 생각을 합니다.
죽음은 슬프고 아프고 무섭고 두려운 일입니다. 죽음은 생의 완성이라는 인문적 성찰과 죽음이 마지막은 아니라는 신앙적 수용에 기대어 보기도 합니다만 죽음이라는 차가운 비정함 앞에서 막막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무서운 심연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 이후의 영역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신앙적 상상을 해볼 수 있지만 우리의 이해가 가 닿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닐 것입니다. 어떤 죽음이 자기에게 오게 될지 우리의 힘으로 조정할 수도 없습니다. 가끔 농담처럼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전쟁과 질병과 사건과 사고에 의해 삶이 강제적으로 거두어지지 않고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에 의해 삶이 마감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모든 사람이 늙어 자연사하는 세상이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세상과 운명이 우리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죽음 이후와 죽음이라는 운명은 철저하게 주님 섭리의 몫일 것입니다. 그저 우리는 우리의 생을 살아갈 뿐입니다. 죽을 때 쯤 갑작스런 깨달음도 없을 것입니다. 작년 토마스 키팅 신부의 마지막 인터뷰와 이어령 선생의 최근 인터뷰를 보고 다시 한 번 절감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사유했던 방식으로, 자기 생에 의미부여를 하며 살아왔던 방식으로 자신의 생을 정리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람은 그저 살아온 자신의 모습대로 죽을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자기의 생에서 소중하게 여긴 것들을 의연하게 행하는 일일 것입니다.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허락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글을 쓰며 자신의 운명을 살아냈던 박서영 시인을 기억하면서 나는 무엇을 하며 언젠가 다가올 내 생의 마지막 시간을 견뎌낼 것인지 잠시 생각합니다.
* 그동안 ‘시(詩) 읽어주는 신부’를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과 연재를 맡아주신 정희완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월간빛, 2019년 12월호, 정희완 요한 신부(안동교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