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델창 2020. 2. 13. 10:12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이 나를 싫어하면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마음이 불편해지거나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자기가 자기를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각이 없고, 오히려 양심성찰을 잘한다고 생각합니다. 양심성찰과 자기비난은 다른 건데 말이지요.


자기비난을 하면서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증상은 이렇습니다.

일등을 못했을 때 실망이 아니라 수치와 두려움이 엄습하는 사람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실천하지 못하는 자신이 죄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실수에도 혼자서 자기 혐오감, 모멸감에 빠지는 사람들, 마음 안에서 울렁울렁 올라오는 욕망이 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반성하기를 마치 몸뚱어리에 채찍질하듯이 하는 사람들.


이런 분들이 가진 부모상, 하느님상은 이상하게도 동일합니다.

하느님은 완전하시다, 부모님도 완전하시다, 그분들의 완전하심에 비하여 나는 형편없는 자식이고, 죄인이다라는 미묘하고 병적인 자의식.

교리상으로는 맞는 말인데, 심리적으로 특히 병적인 자의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심한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신앙의 명제입니다. 대개 이렇게 신경증적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 자기 자신에 대한 무의식적 혐오감을 가진 분들은 윤리적 관념이 초등학교 수준에서 멈춰 있습니다. 고결하지만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위태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왜 이렇게 사는 걸까? 성장하지 못한 초자아, 순종적인 우둔한 삶, 마음속 깊은 곳에 똬리를 튼 뱀들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뱀의 목을 밟고 나타나셨습니다.


우리 교회 신자 분들은 오래 전부터 자신의 약점, 자신이 지은 죄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들을 고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천주교 신자들은 착하다는 호평을 받았으나 내적인 문제는 적지 않았습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심리적 문제 특히 신경증적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피터 드러커는 이렇게 말합니다.

약점으로는 그 어떤 성과도 낳을 수가 없다. 성과를 낳는 것은 강점이다. 자기의 강점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약점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 강점은 보려고도 하지 않고, 약점을 고치는 데만 모든 것을 바친다면 결국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자기 문제에만 집중하고, 그것을 고치는 데만 애쓰다 보면 착하다는 소리는 들을지언정 성공한 사람이란 말은 듣기 어렵습니다. 문제에만 집중하면 아무래도 소심해지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는 노력은 좋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자원을 찾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입니다. 만약 우리가 소심한 신앙생활을 한다면, 오래전 수도자들처럼 심리적 은둔생활, 심리적 자폐현상 안에서 산다면 주님으로부터 당신이 주신 것 이상의 결실을 맺지 못한 부분에 대하여 엄한 판단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자기 몫의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단지 사는 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인생을 꽃피워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스스로에 대한 편견이 존재합니다.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춰야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편견, 소위 멀쩡한 정신을 가진 완벽한 사람이라야 인생에서 자기 자리를 잡을 수 있다는 편견. 그런 생각은 그야말로 편견입니다. 우선, 누구라도 자기 인생을 살아갈 도구, 자기 무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계의 생명체들을 보면 모두 생존기제들을 가지고 있는데, 사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 우리가 정상적이 아니라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업적이 적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철학자 니체는 매독에 의한 착란증세에 시달렸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라는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분열증 환자인 니진스키는 백조의 호수안무를 하였고, “무기여 잘 있거라를 쓴 헤밍웨이는 우울증 환자였습니다. 아브라함 링컨 역시 우울증, 마틴 루터, 빈센트 반 고흐 등등도 우울증에 시달렸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의 약함에 밀리지 않고, 자신에게 정신적 문제가 있음을 개의치 않고, 자기 안의 재능이 만개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삶을 통하여 인류사에 기록될만한 업적을 세웠습니다. 이렇듯 세상 사람들 중에 멀쩡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내가 미쳤어하는 말은 그만하지요.


사람이 가진 병들은 그 내용이 다양합니다.

치료해서 고칠 수 있는 병이 있는가하면 아무리 애를 써도 고치기 어려운 병도 있습니다. 요즈음은 암을 데리고 사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암을 퇴치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 분들이 암을 마치 친구처럼 데리고 사는 거지요. 선종하신 최경록 신부님은 식사하시면서 암 부위를 보고 너도 먹어라하셨다고 합니다.


육체적인 병뿐만 아니라 정신적 문제들도 그러합니다.

심리치료를 통하여 치료되는 것이 있는가하면 모든 방법을 동원해도 고치기 어려운 문제들도 많습니다. 그런 때에는 그 병을 자기 아이처럼 데리고 살아야 합니다. 예컨대 화가 치밀어 오르면 너 또 화가 났나보구나하고, 강박증이 올라오면 강박이, 너 왔구나하는 식으로 아이 취급을 하는 겁니다. 억지로 떼어내려 하면 드세게 저항하는 놈이 아이처럼 대하면 극악을 떨지 못하고 수그러드는 느낌이 듭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처럼 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여기에도 적용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뜬금없는 생각을 해봅니다.

       

* 홍성남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