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읽어주는 신부] 생의 시간 속에서 드러나는 사람의 아름다움
시는 이해하기보다 느끼는 것입니다. 좋은 시는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좋은 시는 분석과 해석을 통해서라기보다 느낌과 감각으로 알아챕니다. 물론 좋은 시란 읽는 나 자신의 기준과 입장에서 좋은 시라는 뜻입니다. 좋은 시를 발견하고 읽으면 그저 기분이 좋습니다. 왜 그 시가 나에게 감동으로 왔는지를 나중에 곰곰이 생각하면, 어떤 원인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언제나 나중의 일입니다. 또 어떤 시들은 처음 읽었을 때는 그 느낌이 희미하다가 두 번째 읽었을 때 강한 느낌으로 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강한 느낌 역시 어떤 설명과 이해를 통해서라기보다는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다가옵니다.
시와 시인은 구별됩니다. 때때로 창조는 주체를 배반하는 행위입니다. 시의 언어는 자주 시인의 생각을 넘어섭니다. 시적 언어가 갖고 있는 고유의 힘은 시인의 통제를 쉽게 벗어납니다. 반드시 시와 시인을 연결해서 시를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시와 시인이 연결될 때, 시는 사람과 삶의 비의(秘義)를 슬쩍 드러내기도 합니다. 사실 저는 시에서 시인의 은밀한 흔적을 발견할 때 기쁩니다. 시인이 어떤 생을 살아왔는지, 시인이 자신의 생을 어떻게 수용하고 이해하며 살아가는지, 생의 여정에서 다가오는 것들에 대해 시인은 어떤 반응과 태도를 취하며 살아왔는지, 그 내밀한 자취를 시에서 발견할 때, 그 시는 저에게 공감의 기쁨을 알려주는 전언(傳言)이며 생의 신비를 알려주는 지혜입니다.
요즘 사람의 아름다움을 자주 생각합니다. 사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안치환의 노래나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박노해의 명제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표현들은 너무 유명해서 오히려 진정한 의미와 내용을 놓치게 만듭니다. 너무 알려진 표현은 자꾸만 소비되는 형식으로 사용되어, 상기시키는 힘을 상실한다는 현대사회의 역설입니다. 제가 사람의 아름다움을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표현들을 통해 느끼는 사람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사람의 실재를 통해 느끼는 아름다움을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하기보다 아름다운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마도 더 정확한 것 같습니다. 직접적으로 만나 느끼는 것이든 글과 뉴스를 통해 간접적으로 만나 느끼는 것이든, 아름다운 사람이 주는 감동적인 느낌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아름다운 사람을 발견할 때 기분이 좋고 뭔가 환해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사람의 아름다움, 아름다운 사람에 대한 생각과 기준은 저마다 다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이루는 어떤 성취들을 통해 사람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역경과 힘듦 속에서 끈질긴 노력을 통해 어떤 결과를 이루어내는 사람들의 아름다움이 자주 언급됩니다. 성공의 미담 속에서 또는 자기계발의 담론 속에서 언급되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제가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아름다움은 자기 생의 운명을 견뎌내는 방식을 통해 드러나는 사람의 아름다움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운명을 살아갑니다. 누구나 자신의 운명이 더 힘들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결국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지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운명은 다 저마다의 아픔과 힘듦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넓은 맥락에서 보면, 조금 더 힘든 운명이 있기도 합니다. 자기 탓 아닌 것들이 멍에처럼 힘들게 부과되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가정사적 파탄의 환경이, 어린 시절의 궁핍한 경제적 어려움이, 자신의 운명을 지고 나갈 물질적 · 정서적 힘을 키우는데 악조건으로 작용되기도 합니다. 운명은 평등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제 운명을 지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슬픈 운명입니다.
슬프고 힘든 운명에 대해 불평과 불만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때때로 그 불평과 불만이 창조의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불평과 불만의 형식이든 수용과 인내의 형식이든 사람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제 운명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아름다움, 아름다운 사람은 결국 자신의 운명을 어떤 방식으로 수용하고 응대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안현미의 시들을 통해 안현미라는 사람(시인)을 발견합니다. 물론 시를 통해 본 시인은, 읽는 독자인 제 자신의 편견과 시선 속에서, 오독(誤讀)된 사람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를 읽는 내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고 안현미라는 시인이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안현미 시인은 세 권의 시집을 냈습니다. 『곰곰』(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문예중앙, 2011 재출간), 『이별의 재구성』(창비, 2009),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창비, 2014)입니다. 시들 속에 언뜻언뜻 비치는 시인의 생과 시인의 자전적 짧은 산문과 인터뷰 속에서 살짝 엿볼 수 있는 시인의 운명은, 안현미 시인의 시들이 보여주는 리듬과 정서적 흐름과 표현방식과 맞물려 묘한 매력과 느낌을 낳습니다. 시집 도처에 생의 여정에서 가난한 여성이 겪어야만 했던 아픔과 힘듦이 청승의 방식이 아니라 가볍고 발랄한 방식으로 노래되고 있습니다. 가난, 여자(엄마), 생의 시간들, 그리고 그 속에서 시를 쓴다는 것에 대한 생각과 느낌이 안현미 시의 중심을 이룹니다.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것은 한 달 치의 방과 한 달 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바쳐 벌레가 되었다 불 꺼진 방에서 우우, 우, 우 거짓말을 타전하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거짓말 같은 시를!”(‘거짓말을 타전하다’) “어디까지가 바닥인가요? 왜 생(生)은 고장투성이인가요? 당신, 생은 다 그런 거라고 눙치지 말아요.”(‘고장난 심장’) “종합선물세트처럼 주어지는 생을 사는 건 당신들이지 나는 아니예요, 나는 착란의 운명을 타고난 빛나지 않는 별, 빛나는 별도 언젠가는 늙고 죽어요 우리 모두는 그런 운명을 갖고 태어나지만 영원을 살 것처럼 착란 속에서 살며 비애도 회한도 모르는 얼굴로 우리들은 너무나 말짱해요 착란에 휩싸인 봄이에요.”(‘屍口門 밖, 봄’)
태백에서 가난한 광부의 딸로 태어나, 낳아준 엄마와 길러준 엄마의 혼선 속에서, 가난한 집 여자 아이가 택할 수밖에 없는 여상과 사무원의 삶 속에서, 이른 나이에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뒤늦게 산업대학을 다니면서 시를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은 어떤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최근에야 비로소 서울시 문화 영역의 정규직 공무원으로 채용되었다는 소식을 뉴스를 통해 들었습니다. 하지만 마흔의 중반까지 비정규직 삶을 살면서 시인의 일을 했던 여자는 과연 어떤 생각과 느낌으로 자신의 운명을 견뎌왔는지 궁금했습니다. 시인이 자기 생의 시간을 어떻게 통과했는지 궁금했습니다.
침묵에 대하여 묻는 아이에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은 침묵이다 시간에 대하여도 그렇다
태백산으로 말라죽은 나무들을 보러 갔던 여름이 있었지요
그때 앞서 걷던 당신의 뒷모습을 보면서 당신만큼 나이가 들면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하였습니다
이제 내가 그 나이만큼 되어 시간은 내게 당신 같은 사람이 되었냐고 묻고 있습니다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어 말라죽은 나무 옆에서 말라죽어가는 나무를 쳐다보기만 합니다
그러는 사이 바람은 안개를 부려놓았고 열일곱 걸음을 걸어가도 당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의 시간을 따라갔으나 나의 시간은 그곳에 당도하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은, 당신은 수수께끼 당신에 대하여 묻는 내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인 당신을 침묵과 함께 놓아두고 죽은 시간
열일곱 걸음을 걸어와 다시 말라죽은 나무들을 보러 태백에 왔습니다 한때 간곡하게 나이기를 바랐던 사랑은 인간의 일이었지만 그 사랑이 죽어서도 나무인 것은 시간들의 일이었습니다
안현미의 ‘시간들’이라는 시의 전문입니다.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시입니다. 이 시는 읽는 독자에게 생의 시간을 상기시킵니다. 저 역시 이 시를 읽으며 생의 시간을 생각합니다. 생의 시간 속에는 “시간을 잃어야 할 시간”(‘마침표’)도 있고, 오독하는 은밀한 시간도 있고(‘갈대밭에서 읽다’), “흘러내리는 시간”(‘고장난 심장’)도 있고, “마술같은 시간”(‘열려라 참깨!’)도 있고, 오려내야 할 시간도 있고(‘오후 세시’), “도둑맞은 시간”(‘러시안룰렛’)도 있습니다. 그 숱한 시간들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환승역으로 돌아와 시간을 바꾸어 탑니다.”(‘환을 연주하다’) 분명 “시간은 하나의 커다란 구멍이고 끝끝내 삶은 죽음”(‘계절병’)이고, “시간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곳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고(‘고장난 심장’) 시인은 고백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끝날 줄 알면서도 시작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이별수리센터’)고 노래합니다.
시인에게 생은 “불가능을 사랑했던 시간과 풍랑이 잦았던 마음”(‘눈물의 입구’)의 연속이지만, “시간조차 그 구멍으로부터 발원하는” “엄마라는 구멍”(‘계절병’)과 “가능성이 많은 장소”를 알려주는 “수행자의 영혼을 지닌 나무”(‘가능성이 많은 장소로 가는 것’)들 덕분에 시인은 휴일의 안식과 사랑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계절병’) 시인에게 엄마와 나무라는 표지는 “다른 차원의 시간이 찾아 올 수 있게/ 다른 얼굴의 마음이 찾아올 수 있게”(‘사랑도 없이’) 하는 것입니다. 엄마와 나무 덕분에 시인은 “사랑이 확장되는 시간”(‘사랑’)을 체험한다고 노래합니다.
“삶의 비애를 적확하게 바라본다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닐테지만”(‘내간체’) 얼얼한 삶의 현실을 인식한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하지만 울음과 연대와 견딤을 통해 제 운명을 견뎌가는 모습은 애잔한 아름다움을 낳습니다. 시인에게 시는 우는 행위이며, 엄마가 된다는 것은 시원의 창조와 다시 시작함을 의미하며, 나무는 일상에 뿌리내리고 꿋꿋하게 소멸을 견디는 삶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존 사람들은 하루종일 내리는 비를 여자비라고 한다/ 여자들만이 그렇게 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여자비’) “너도 곧 엄마가 되겠구나 무구하게 당도할 누군가의 기원이 되겠구나.”(‘내간체’) “자작나무의 영혼을 가진 당신과 함께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아무도 가보지 못한 이 별의 어떤 가능성.”(‘이 별의 재구성’)
안현미의 시를 읽으며, 고단한 삶 속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시인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어쩌면 우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노래들인지도 몰라/ 우리는 모두 울음들인지도 몰라.”(‘중얼거리는 나무’) “습관적으로 희망하고 반복적으로 절망하는 날들이 지나갔지만 아무도 여자가 어디로 갔는지 묻지 않는”(‘그 해 여름’) 무심한 생의 시간 속에서 “비굴은 나를 시 쓰게”(‘비굴 레시피’) 한다고 고백합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대단하고 특별한 그 무엇이 아니라 그저 ‘시시하고’ ‘거짓말을 제조하고’ ‘거짓말을 타전하는’ 일에 불과합니다. 그저 “낮에는 돈 벌고 밤에는 시 쓴다.”(‘정치적인 시’)고 시인은 말합니다. 하지만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이 된다는 것이고 묵묵히 생을 견디는 일입니다. “지나치게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 그게 시라고 나는 생각해오고 있다 그게 나무라고 나는 생각해오고 있다.”(‘그도 그렇겠다’) 그래서 시인은 “가끔 내가 쓰는 모든 시들이 유서 같다가 그것들이 모두 연서임을 깨닫는 새벽이 도착한다”(‘불멸의 뒤란’)고 노래합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의 언어를 갖는 일입니다. 자기 삶을 표현할 자기의 언어를 갖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자기의 생을 서술한다는 것은 단순히 운명에 끌려가지 않겠다는 표현이며 고단한 생의 무게를 담담하게 견뎌내겠다는 의지의 발현입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성공과 성취를 통해 자신의 척박한 운명을 극복하겠다는 세속의 삿된 마음이라기보다는 운명을 정직하게 응시하고 조용히 응대하겠다는 생의 의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속사회의 어떤 성공 스토리보다 안현미의 시 쓰기가 더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김정환 시인이 안현미 시인을 만날 때면 외친다는 “안현미 만세”라는 말에 나도 동의하고 싶습니다. 시를 통해 알게 된 시인의 모습이지만, 그래서 제 자신의 편견과 바람이 투사(投射)된 것일 수도 있지만, 안현미 시인의 모습과 그의 시 쓰기가 참 아름답게 보입니다.
아름다운 사람, 사람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가 점점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 그가 가진 권력과 지위와 명예와 자본과 외모와 인맥으로 평가되고 인정되는 시대에 참 사람의 아름다움을 찾기란 힘든 일입니다. 사람의 아름다움은 그의 소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각과 느낌이 드러나는 일상의 자리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견뎌내고 응대하는 방식에서 표현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종교인들에게서도 사람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가 점점 어렵습니다. 과연 내 모습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치고 있을까 자문해봅니다. 내 일상의 삶이, 운명을 견뎌내는 나 자신의 방식이 아름다운 모습일까 궁금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은 그분이 가진 권능과 권세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인간으로 강생하시고 십자가의 비참한 모욕과 죽음마저도 자신의 운명(섭리)으로 받아들이신 데에 있다는 것을 오늘의 교회와 우리 신앙인들이 자주 잊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저어하는 마음이 듭니다.
[월간빛, 2018년 4월호, 정희완 요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조직신학 교수, 안동교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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