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관련정보/교리서 해설 301

교부들의 신앙: 대 그레고리오 - 역사의 파고 앞에서 키를 잡고

[교부들의 신앙 – 대 그레고리오 3] 역사의 파고 앞에서 키를 잡고 2020년 한해도 저물어 갑니다. 코로나19 감염증 때문에 귀한 시간을 황망하게 지내 버린 것 같은 아쉬움이 진하게 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언제나 끝날 것인가 하는 걱정도 함께 들지요. 혹자들이 주장하듯 이러한 상황이 새로운 일상이 되는 것일까? 어떤 이들은 이보다 더 심각한 기후 위기가 코로나 이후 인류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일까? 불안은 여전히 우리 곁을 맴도는 것 같습니다. 풍랑에도 격려를 멈추지 않은 키잡이 지난 호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대 그레고리오는 어려운 시기에 교종직을 수행한 교부입니다. 그는 사목의 직무란 본질적으로 영혼을 다스리는 일이며 무지한 자들이 사목 직무를 맡는다면 그것은 참으..

교부들의 신앙: 대 그레고리오 - 영혼의 의사 목자들의 직무

[교부들의 신앙 – 대 그레고리오 2] 영혼의 의사 목자들의 직무 코로나19의 현실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를 새롭게 보게 됩니다. 이른바 선진국이라 여겼던 나라들의, 전염병으로부터 자국민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의료 체계나 사재기로 생활용품이 동나는 모습 등을 보면서 오히려 우리를 새롭게 평가하게 되었지요. 눈을 나라 안으로 돌려보면, 일반적으로 존경받고 권위가 있다고 여겨지던 사람들의 민낯을 확인하는 충격도 컸습니다. 8월 15일 광화문 집회로 그동안 수그러들었던 코로나19를 재확산시켜 국민적 지탄을 받은 일부 개신교 성직자들, 온 나라가 전염병과 싸우느라 애쓰는 와중에 파업을 강행한 의사들의 모습은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사회의 지도층을 이루는 사람들이라 여겼던 탓에 충격도 더 컸던 것 같습니다. ..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신학대전은 과연 그리스도론을 경시했는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신학대전」은 과연 그리스도론을 경시했는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서 그리스도론에 관한 문제는 제III부에서야 등장한다. 아퀴나스가 중요한 그리스도론을 이렇게 뒤늦게 다루었다는 사실은 많은 신학자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어느 신학에서든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먼저 나타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분은 우리의 삶과 역사보다도 더 중요하지 않은가? 특히 종교개혁 이후에 개신교 신학은 그리스도론이 중심이 되어서 그 저술도 그리스도론으로부터 출발하는 경향을 지녔다. 이런 경향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현대 가톨릭 신학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그런데 「신학대전」 제III부에서조차 아퀴나스는 예수님의 활동부터 시작하지 않고, 신앙으로 수용된 육화의 신비(1-26)부터 ..

삶의 지혜47: 암브로시우스의 루카 복음 주해에서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47) 암브로시우스의 ‘루카 복음 주해’에서 주님의 탄생 예고와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본문] 일반적으로 믿음을 요구하는 사람이 그 믿음을 북돋아주는 것이 윤리적인 통념입니다. 그리하여 천사 가브리엘이 신비를 전할 때, 동정 마리아에게 한 가지 예를 들음으로써 그 믿음이 북돋아지도록, 한 나이 많고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 엘리사벳이 잉태한 사실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기만 한다면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마리아는 이 말을 듣자, 전갈을 불신했거나, 천사의 말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거나, 증거로 든 예를 의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받은 약속에 대한 기쁨에 넘쳐서, 봉사하려는 경건한 마음에 차서, 그리고 그 기쁨에 이끌려 급히 ..

삶의 지혜46: 암브로시우스의 죽음의 복됨에서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46) 암브로시우스의 ‘죽음의 복됨’에서 죽음을 본받는 자 [본문] 사도는 “세상이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나는 세상에 대해 죽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현세의 삶에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한 복된 죽음이 있음을 압니다. 사도는 우리 안에 예수님의 죽음을 지니라고 권고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생명도 지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 생명이 활동하려면 죽음이 먼저 작용해야 합니다. 죽음 후의 복된 생명이란 승리 후의 복된 생명, 곧 온갖 투쟁을 종식시키는 복된 생명을 말합니다. 영적인 법에 대항하는 육적인 법의 세력이 사라지고, 죽어야 할 육신 안에 모든 격정이 소멸되어 마침내 승리가 자리 하는 생명을 말합니다..

삶의 지혜45: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편지에서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45)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편지’에서 “기도의 장소를 바꾼다고 해서,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기도의 장소를 바꾼다고 해서, 우리가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에서 기도하든지 간에,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혼 안에 머무르시고 거니실 수 있는 안식처를 마련해 드린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내적 자아가 천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면, 비록 골고타 언덕이나 올리브 동산이나 주님께서 부활하셨던 바로 그 장소에 우리가 서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맞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마치 단 한 번도 주님을 고백해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

삶의 지혜44: 사막 교부들의 생애에서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44) ‘사막 교부들의 생애’에서 “6일 동안 단식을 한 형제가 무슨 수를 쓴다고 해도, 병자들을 돌본 형제와 같아질 수는 없습니다.” [본문] 어떤 형제가 노인에게 물음을 던졌다.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한 형제는 독방에서 6일 동안 단식을 하면서 힘든 노동을 했습니다. 또 다른 형제는 비록 단식은 하지 않았지만, 병자들을 돌보았습니다. 어떤 형제의 일이 하느님을 더 기쁘게 해드릴까요?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6일 동안 단식을 한 형제가 무슨 수를 쓴다고 해도, 병자들을 돌본 형제와 같아질 수는 없습니다.” ‘사막 교부들의 생애’(De vitis patrum) 17, 18 [해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어떤 삶을 살아야 ..

삶의 지혜43: 치프리아누스의 가톨릭 교회 일치에서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43) 교회의 일치와 평화 치프리아누스의 ‘가톨릭 교회 일치’에서 [본문] “우리가 그리스도의 상속자라면 그리스도의 평화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면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 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평화를 위해 일하고 마음이 온순하며, 솔직한 말을 하고 사랑으로 화목하며, 일치의 고리로 긴밀히 결합되어 있어야 합니다. 사도들의 시대에는 이러한 일치가 있었고 새로운 백성인 신자들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끊임없이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 그러나 우리 안에는 이러한 일치 정신이 약해지고, 관대한 활동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치프리..

삶의 지혜42: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에우트로피우스 강해에서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42) 순결한 창녀인 교회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에우트로피우스 강해’에서 [본문] 그리스도께서는 창녀와 사랑에 빠지셨습니다! 어떻게 사랑하십니까? 그 창녀가 높이 올라갈 수 없었기에, 그분께서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창녀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그 여인이 술에 취해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어떻게 들어가셨습니까? 벌거벗은 그 여인의 신적인 상태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창녀의 상태에 들어가셨습니다. 왜냐하면, 창녀가 그분을 뵙고서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도망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에 사로잡혀 짐승처럼 되어버린 상처투성이의 여인을 발견하십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십니까? 그 창녀를 맞아들이십니다. 정말 그 창녀를 아내로 맞이하십니다. 그리고 그 ..

삶의 지혜41: 아우구스티누스의 요한1서 강해에서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41) 아우구스티누스의 요한1서 강해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본문] * 본문1(요한 1서 4장 7∼21절)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실 사랑은 하느님으로부터 오고 사랑하는 모든 이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고 하느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모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가운데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임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으니, 그것은 우리가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이란 이렇습니다. 곧,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임의 아들을 우리 죄 때문에 속죄의 제물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