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정의와 양심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시청 앞 빌리 브란트는 독일 국가를 합창하고 있는 수십만 군중을 향해 외쳤다. “이제 우리는 하나가 될 것입니다.” 서독과 동독을 통일 독일로 이끈 빌리 브란트는 사생아로 태어나 사회민주당 당원이었던 외할아버지 손에 자랐다. 자연스럽게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 라는 가치관을 갖게된 그는 사회 민주당 청년부에서 활동하다 게슈타포에 쫓겨 노르웨이와 스웨덴에서 반 나치 운동가로 활동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독일로 돌아와 시민권을 회복하고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한 브란트에게 대중적인 명성을 안겨 준 것은 소련이 헝가리 봉기를 무력 진압한 데 항의하는 시위에서 보여 준 통솔력 이였는데 그는 유리창이 박살난 방송차 위에 올라서서 군중들에게 호소했다. 대립은 전쟁을 일으킬 뿐입니다. 우리 하나된 마음으로 국가를 부릅시다. 이듬해 그는 서베를린 시장이 되었고 이어 1969년에는 총리로 선출되었다. 브란트는 독일의 미래를 위해 같은 민족인 동독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분단 이후 서독은 동독과 국교를 맺은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와는 교류하지 않았지만 브란트는 처음으로 동유럽과 화해를 시도했다. 폴란트를 찾았을 때 그는 2차 대전 당시 유대인 탄압 지역을 둘러보다가 게토의 위령탑 앞에 무릎을 끓고 눈물을 흘려 전 세계인의 가슴을 뭉쿨 하게 하였.다 나치의 잘못에 대한 그 어떤 보상이나 사죄보다 감동적인 행동이었으며 1971년 그는 적대국과의 긴장 해소에 기여한 업적을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브란트의 정치적인 영향력과 국민들의 신임을 시기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보스정당과 언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독일 평화를 이끄는데 헌신하던 브란트는 동료가 총리 사무실에서 기밀문서를 빼내 동독에 넘겨준 사건으로 총리직을 사임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정치인들에게 비폭력과 평화를 호소했으며 독일과 마찬가지로 분단된 우리 한반도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던 그는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고 3년 뒤 비로소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브란트의 또 다른 이름은 국제 정의와 양심이었다. 빌리 브란트 1913∼1992 영상제작 : 동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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