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읽어주는 신부] 씩씩한 슬픔
왜 생은 슬픔 속에서 더 빛나는지, 쓸쓸한 마음이 들 때가 많습니다. 생의 진실은 희극보다는 비극 속에서 더 잘 드러나는가 봅니다. 삶의 아름다움은 슬픔과 아픔, 고통과 상처 안에서 더 눈부시다는 아이러니가 싫지만 납득될 때가 참 많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분명 기쁨보다는 슬픔에서, 고통과 상처 안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습니다. 사람의 성숙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슬픈 일들을 어떻게 응대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슬픔과 아픔, 고통과 상처를 감내하고 견뎌내면서 조금씩 씩씩해지고 의연해집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인가 봅니다. 사람이 자아와 주체라는 자의식을 가지는 한 개체적일 수밖에 없고, 개체적인 한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는 삶의 역설을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또한 사람은 개체적이고 이기적이어서 근본적 소통과 연대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물론 한 종교의 성직자로 살아가는 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람과 사람의 일치와 연대를 믿고 고백(희망)합니다. 하지만 생의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면 그 근원적 불가능성을 자주 절감합니다. 오직 신앙의 희망 안에서만 소통과 연대가 가능할 것입니다. 삶의 현실에서의 그 근원적 불가능성 속에서도 연대의 가능성을 그래도 조금이나마 볼 수 있는 곳이 슬픔의 자리일 것입니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신형철)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쁨을 노래하는 시인보다 슬픔과 고통과 상처에 예민한 시인에게 더 눈길이 갑니다.
김소연의 시집을 읽으면서 내내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왜 기쁨보다 슬픔에 더 예민한지, 고통과 상처에 왜 마음이 더 많이 요동치는지 알 것 같으면서도 궁금해졌습니다. 김소연 시인은 마음의 빛깔과 결에 대한 섬세한 보고서인 『마음사전』(마음산책, 2008)이라는 책을 통해 널리 알려진 시인입니다. 1967년생 경주 출신이며, ‘21세기 전망’의 동인이었던 함성호 시인과 결혼했습니다. 시인인 동시에 건축가인 남편이 아내 시인을 위해 특별히 지어준 집에서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다는, 얼핏 보면 생의 외적 어려움이 없는 시인의 이력과 시인이 시를 통해 뿜어내는 슬픔의 정서가 잘 연결되지 않습니다. 카프카의 삶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일상의 삶과 내면의 마음의 파동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는 걸 알지만 가끔 곤혹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시인의 사적인 삶을 알 때 그 시인의 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생에서 일관된 논리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는 듯합니다. 생의 복잡성과 우연성은 하나의 프레임 안에서 해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김소연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조용해지고 쓸쓸한 느낌이 듭니다. 문장 속에 스며있는 시인의 마음의 결에 조금은 지치고 슬퍼지는 느낌입니다. “한 사람의 생 읽어내느라 소모된 시간들, 나는 비로소 문장 속으로 스며서, 이 골목 저 골목을 흡흡, 냄새 맡고 때론 휘젓고 다니며, 만져보고 안아보았다”(「버리고 돌아오다」)는 시인의 첫 시집, 첫 시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삶에 대한 시인의 태도는 “사색했다”, “지켜보았다”, “애써 외우는 내가 있다”, “바라보고 있다”(「학살의 일부 11」)는 술어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생을 생각하고 응시하며 생의 파동을 마음 안에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은 그 본성상 슬플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생은 그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축복이며 선물이지만 삶의 자리마다 우리에게 다가오고 마음을 흔드는 것들은 쓸쓸하고 슬픈 정서 속에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소멸을 향해 갈 수밖에 없는 존재의 슬픈 속성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이라고 말해줄게, 강물이 흐르고 있다고, 깊지는 않다고, 작은 배에 작은 노가 있다고, 강을 건널 준비가 다 됐다고 말해줄게.”(「강과 나」) 거대한 슬픔과 고통이 없다 해도 생은 그저 그 자체로서 쓸쓸하고 슬픈 일이기도 합니다. 또 어쩌면 우리가 슬픈 이유는 몸과 마음의 어긋남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몸 늙는 대로/ 마음 늙기를 원해 보네/ 마음 가는 곳에 몸이 가 있어야 했던/ 청춘은 그러나 노예처럼.”(「나무 그림자 안에 내 그림자」)
시인이 바라보는 생은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무심하고 “너그러움 없이/ 어김없이” 비정합니다.(「제로」) “느낄 수 있는 건 잠깐의 반가움과/ 오랜 두려움뿐”이고 “살고 싶어서 더러워진 사람이” 될 수밖에 없고 “하루에 한 가지씩만 다독이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여행자」) 생은 상처와 비명과 흉터로 얼룩져 있고(「새벽」) 우리는 “서로의 흉터에서”(「연두가 되는 고통」) 살아갑니다.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가장 거대한 흉터”(「편향나무」)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생은 상처를 주고받는 삶입니다. 비록 시간 속에서 상처가 아물어가도 그 상처의 흔적은 잘 지워지지 않습니다. “시간이 여위어간다/ 아픔이 유순해진다/ 내가 알던 흉터들이 짙어진다.”(「연두가 되는 고통」) 생은 그래서 미움과 미안함과 용서가 복잡하게 섞인 채로 흘러갑니다. “꿈과 생의 틈새에 누워 미워하던 것들에게 미안해하고 있다// 이야기는 그렇게 내 곁에 왔고 내 곁을 떠나간다// 가만히 있기만 하여도 용서가 구름처럼 흘러간다.”(「원룸」) 마음은 상처의 흔적을 오래 간직합니다. 마음은 결이 얇아 사소한 상처도 얼룩으로 간직합니다. “물이 지나간 자리도/ 얼룩이 남을 것”(「불귀 9」)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당신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마음 안에 상처를 켜켜이 쌓은 채로 살아갑니다. “한 생애를 당신으로 살아가는/ 흔적이 내 안에 쌓여갔다/ 나는 두 겹이 되어 서 있었다.”(「불귀 4」) 누군가에게 당신으로 살아가지만 우리의 생은 결국 혼자이고 그래서 슬픕니다.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 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
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
빠삐용, 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
꿈속에선 자꾸 어린 내가 죄를 짓는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민이 몸을 뒤척여 죄를 통과합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슬픔이 말라갑니다
잘 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 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 슬픔은 또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할 테니까요
검게 익은 자두를 베어 물 때 손목을 타고 다디단 진물이 흘러내릴 때 아 맛있다, 라고 말하고 나 혼자 들어요
슬픈 정서가 가득한 시집 『수학자의 아침』(문학과지성사, 2013)에 실린 「그래서」 라는 시의 전문입니다. 슬픔이 어디서 기원되었는지는 도저히 알 수 없지만 읽다보면 마음이 쓸쓸해지는 시가 시집 도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애는/ 우리, 라는 말을 저 멀리 밀쳐놓았다/ 죽지 못해 사는 그 애의 하루하루가/ 죽음을 능가하고 있었다”(「백반」)고, “우리 는/ 서로가 기억하던 그 사람인 척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사랑과 희망의 거리」)고, “슬픔을 슬퍼하는 사람이 오로지 슬퍼 보인다/ 사람인 것에 지쳐가는 사람만이 오로지 사람다워 보인다”(「생일」)고 시인은 노래합니다. 시집의 발문에 적힌, 작년에 작고한 황현산 선생의 말마저도 저에겐 슬픔으로 다가옵니다. “슬픔만이 진정으로 씩씩한 것을 만든다는 이 아이러니가 슬프다, 소연아.”
가장 최근의 시집 『i에게』(아침달, 2018)에서도 시인의 마음은 여전히 슬프고 쓸쓸한 것 같습니다. “망가지는 것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조용히 오래오래 망가져간다// 다 망가지고 나서야/ 누군가에게 발견이 되는 것”(「손아귀」)이라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모든 것에 익숙해져버렸”(「경배」)다고, “용기라는 말을 자주 쓰는 자는 모두 비겁한 사람이 되었다/ 내 생각을 나보다 더 잘 읽는 자는 모두 적이 되어 있었다”(「편향나무」)고, “우리를 우리라고 불렀던/ 마지막 시간이 끝났다”(「유월 오후의 우유」)고 시인은 탄식합니다. 그래서 “한 번도 원한 적 없는 이 세계에서/ 백 년을 살아야겠지/ 미치지 않고서 그럴 자신이 있겠니”(「편향나무」)라고 시인은 아프게 반문합니다.
이 슬프고 쓸쓸한 삶의 현실 속에서 시인이 택하는 삶의 방식은, 불가능하지만 어쩔 수 없이 우리가 택할 수밖에 없는, 슬픔의 연대입니다. 비록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지는 않지만 우리가 오직 할 수 있는 것은 슬픔의 공감과 연대라는 역설 말입니다. “사람의 울음을 위로한 자는 그 울음에 접착된다/ 사람의 울음을 이해한 자는 그 울음에 순교한다/ 그러나 울음은/ 유목의 속성이 있어 들어줄 사람을 옮긴다”(「고통을 발명하다」)고 시인은 고백합니다.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의 삶은 슬픈 정서 속에 있습니다. 사랑에서마저도 남자와 여자는 어긋남의 차별적 현실로 존재합니다. “우리라는 자명한 실패를 당신은 사랑이라 호명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돌아서서 모독이라 다시 불렀다.”(「투명해지는 육체」) 그래서 시인에게 여성은 슬픔의 공감과 연대의 상징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비로소 여자의 노래/ 그래서 이것은 비로소 사람이 할 말/ 그래서 이것은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를 우노니”(「이것은 사람이 할 말」)라고 시인은 노래합니다.
슬픈 생의 자리에서 시인이 택하는 또 하나의 삶의 방식은 슬픔에 대해 조금은 담담하고 의연한 태도를 취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림자와 마주하는 일”이며 동시에 “시를 쓰는 일”이기도 합니다. 시인은 두 번째 시집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민음사, 2006)에 실린 짧은 산문 「그림자론」에서 슬픔에 응대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삶의 자세를 설명합니다. 그림자는 “색도 지니지 않고, 표정도 지니지 않은 채, 자세만으로” 사람들에게 “빛과 사물의 관계에 대해 묵언의 말을 건네고” 있습니다. 그림자는 “이 세계에 현현해 있는 모든 현란한 것들의 표정을 지우고, 그 자세만을 담으려” 합니다.
돌아보면 삶은 세세한 영역은 사라지고 큰 줄기만 남아 있습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고 슬프게 했던 그 많은 것들도 돌아보면 미세한 슬픔의 사정은 사라지고 그저 아팠던 기억의 상처로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삶은 낱낱의 표정으로 있기보다는 대강의 윤곽이 보여주는 자세로 남을 뿐입니다. “어김없이 황혼녘이면/ 그림자가 나를 끌고 간다/ 순순히 그가 가자는 곳으로 나는 가보고 있다// 세상 모든 것들의 표정은 지워지고/ 자세만이 남아 있다”(「빛의 모퉁이에서」)고 시인은 담담히 노래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슬픔을 마주하는 우리의 자세는 의연함이어야 한다는 것을 시인은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의연함은 담담하고 슬픈 씩씩함입니다.
요즘 저는 신앙에 대해 다시 생각합니다. 과연 신앙이 무엇인지, 신앙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다시 성찰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신앙한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관습을 실천한다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교리를 배우고 받아들이는 것, 성사 생활을 하는 것, 본당 공동체에 소속되어 친교와 봉사의 활동을 하는 것, 그 모든 것은 분명 신앙의 본질적인 모습이며 표현(표정)입니다. 하지만 저는 요즘 신앙의 “표정”들보다 신앙의 “자세”(태도)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합니다.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자세로 삶을 살아내는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교리와 성사와 친교와 봉사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기 위한 것입니다. 김소연의 시를 읽으며, 표정의 일치보다 자세의 일치를 더 깊이 생각합니다.
[월간빛, 2019년 3월호, 정희완 요한 신부(안동교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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