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읽어주는 신부] 오래된 것들의 아름다움
언제부터인지 고향이라는 말이 그리 애틋한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기억과 회상의 상상력을 잃어버린 것인지, 지금의 일상에 사로잡혀 옛 시절을 상기할 여유를 잃고 있는것인지. 그전에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처음 고향을 떠나 대학 생활을 할 때는 고향이 늘 그리움으로 있었습니다. 조금 단순화시켜 말하면, 고향이라는 공간과 고향에서 보냈던 시절에 대한 향수는 도시의 삶을 견디게 해주는 힘이었습니다. 방학 때 고향에 돌아오면 푸근하고 편안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그 시절 김승옥의 단편 소설들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김승옥의 소설은 시골 출신이 도시에서 겪는 정서적 갈등에 대한, 시골(전근대)과 도시(근대)라는 이중적 환경이 실존적 개인에게 미치는 정서적 영향에 대한 섬세한 묘사와 서술을 담고 있습니다. 그 시절 고향은 늘 원초적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한 인간의 정서적 특성은 초·중·고 시절에 형성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어쩌면 고향은 태어난 곳이라기보다는 초·중·고 시절을 보낸 장소일 것입니다. 또한 고향은 어머니와 가족과 관련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마도 어머니와 가족에 대한 향수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초·중·고 시절을 보낸 곳, 그리고 사랑하는 어머니가 계신 곳, 그곳이 고향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사는 동안 뜻밖에도 제 그리움의 공간은 고향이었다기 보다는 제가 첫 본당신부로 살았던 곳이었습니다. 타국의 삶에서 아련한 향수의 기억으로 떠오르던 공간이 고향이 아니라 첫 부임지라는 사실이 저에게도 조금 이상한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산과 계곡과 바다가 어우러진 공간이라는 자연적 환경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도 돌아가신 어머니가 이제는 고향에 계시지 않다는 사실과 첫 본당신부로 살았던 그 시간이 제 인생의 가장 눈부신 시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제 스스로를 규정하면 저는 냉정한 현실주의자이며 냉혹한 현재주의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기가 언제였을까를 생각하면 항상 첫 본당신부 시절이 떠오릅니다. 삼십대 중후반의 나이, 사제로서 순수한 열정을 지녔던 시기, 그래도 아직은 공동체적 분위기가 남아있던 그 시절 본당의 환경, 아마도 이런 요인들이 그 시간을 저의 가장 눈부신 시절로 기억하게 한 것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자기 생의 가장 눈부신 시간을 보낸 곳, 그곳이 또 다른 의미의 고향이었습니다.
이제는 그 두 고향마저도 점점 흐릿한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고 잊혀져갑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서인지, 그 시절과 지금과의 시간의 거리가 너무 아득해서인지, 지나온 먼 과거의 시간보다는 다가올 미래의 시간이 훨씬 더 가까운 나이에 이르렀기 때문인지, 먼 옛 시절에 대한 향수와 추억보다는 다가올 가까운 미래인 늙음과 죽음에 대한 무의식적인 두려움이 더 크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모든 이유 때문인지 저도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문태준 시인(1970년생)은 오늘의 한국 시단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시인입니다. 2000년 이후 한국 시단에는 길고 낯선 어법의 시를 생산하는 미래파 시인들의 등장이라는 커다란 흐름이 자리합니다. 하지만 문태준 시인은 전통적 서정시의 맥락을 자신만의 새로운 방식으로 이어가는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비슷한 세대의 많은 시인과는 다른 포즈를 취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문태준 시인은 김천시 봉산면 출신입니다. 직지사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시골입니다. 시인은 대학 졸업 후 지금까지 불교방송 PD로 일하고 있습니다. 첫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창비, 2000)에서 일곱 번째 시집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문학동네, 2018)에 이르기까지 문태준 시인은 한결같은 모습으로 “식물적인 서정성, 고즈넉한 서정성”(이광호)을 보여주며 “느린 걸음의 노래”(김주연)들을 부르며 “소처럼 ‘마실’다니며 끔뻑끔뻑”(신형철) 시를 쓰고 있습니다. 문태준 시인은 “형식의 질서를 중요하게 여기는”(김인 환) 시인입니다. 그의 모든 시는 흐트러짐 없이 다듬어져 있습니다. 그의 대부분의 시는 첫 시집 제목이 말해주듯이, 시골(고향)의 풍경을 재잘거리며 속삭이는 목소리로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장석남 시인이 그리는 풍경이 따뜻하고 정겨운 모습의 풍경이라면, 문태준 시인이 그려내는 풍경은 가난과 폐허와 소멸의 운명 속에 있는 처연하고 슬픈 모습의 풍경입니다. “내가 다시 호두나무에게 돌아온 날, 애기집을 들어낸 여자처럼 호두나무가 서 있어서 가슴속이 처연해졌다.”(「호두나무와의 사랑」)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맨발」)에서 살았던 시인의 고향 시절의 체험과 소멸과 사라짐의 불교적 세계관의 영향은 문태준 시인의 시에 깊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은 그저한 호흡의 찰나에 불과하고 삶은 언제나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 예순 갑자를 돌아나온 아버지처럼/ 그 홍역 같은 삶을 한 호흡이라 부르자.”(「한 호흡」) “저 풍경 바깥으로 나오면/ 저 풍경 속으로는/ 누구도 다시 돌아갈 수 없다.”(「젖 물리는 개」)
문태준 시인은 서정시를 쓰는 시인들이 그러하듯이, 사람과 삶에 관한 직접적인 시를 쓰기보다는 사물과 풍경에 대해 시를 씁니다. 하지만 문태준 시인은 사물과 풍경에 대한 관찰과 관조의 시를 쓰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투여하는 응시의 방식으로 시를 쓰는 것 같습니다. 문태준 시인에게 시인이란 사물과 자연의 소리를 듣는 사람입니다. “다시 첫 마음으로 돌아가서, 세계가 연주하는 소리를 듣는다.”(『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시인의 말) 시인은 사물과 자연의 소리를 듣고 그것들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입니다. “나는 지난 여름 내내 흐느끼는 호두나무의 哭을 들었다.”(「호두나무와의 사랑」) “물길 아래/ 돌들은 팔을 괴고 앉아 복화술로 말을 걸고 있네, 물길에 대하여.”(「돌들이 팔을 괴고 앉아」) 문태준 시인에게 시인은 사물을 매개하는 숙주와 같은 존재입니다. “매미가 나무의 어느 슬픔에 내려앉아 우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나무도 기대어 울고 싶었을 것이다/ 나무는 이렇게 한번 크게 울고 또 한 해 입을 다물고 산다.”(「감나무 속으로 매미 한 마리가」) 시인은 나무에 붙어 나무를 대신해서 우는 매미와 같은 존재입니다. 문태준 시인은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정확한 언어, 정갈한 말들로 간결하게 시를 직조합니다.
그이의 뜰에는 돌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나는 그 돌을 한참 마주하곤 했다 돌에는 아무 것도 새긴 게 없었다 돌은 투박하고 늙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나는 그 돌에 매번 설레었다 아침햇살이 새소리와 함께 들어설 때나 바람이 꽃가루와 함께 불어올 때에 돌 위에 표정이 가만하게 생겨나고 신비로운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그리하여 푸른 모과가 열린 오늘 저녁에는 그이의 뜰에 두고 가는 무슨 마음이라도 있는 듯이 돌 쪽으로 자꾸만 돌아보고 돌아보는 것이었다
「입석(立石)」이라는 시의 전문입니다. 문태준 시인의 시 세계와 시를 쓰는 방식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의 하나입니다. 사물에 마음을 불어넣으면 표정이 생긴다고 한 인터뷰에서 시인은 고백합니다. 고요한 정물(靜物)의 세계 속에서 머물던 사물이 시인의 마음을 받아들여 영혼을 가진 존재로 변화됩니다. 일종의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세계가 됩니다.
“돌을 놓고 본다/ 초면인 돌을/ 사흘에 걸러 한 번/ 같은 말을 낮게/ 반복해/ 돌 속에 넣어본다/ 처음으로/ 오늘에/ 웃으시네/ 소금 같은/ 싸락눈도 흩날리게/ 조금/ 돌 속에 넣어본다.”(「사귀게 된 돌」, 전문)
문태준 시인의 시는 깔끔한 정물화 같은 인상을 줍니다. 사람도 자연과 우주 속에서 정물처럼 여겨집니다. 사람과 사물의 구별이 사라집니다. “오늘은 사람도 하늘이 기르는 식물이다.(「봄볕」) “마을로 내려오면 사람들 살아가는 게 별반이 나무와 다르지 않았다.”(「개복숭아나무」) “하루는 여름 속으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서서 손바닥을 펼쳐들었다 생각이 많아진 하늘을 받쳐들었다// 그리고 늘어서서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넓고 먼 곳과 연결되어 있음을 감사해하면서.”(「정물」) 시인에게 모든 것은 풍경이 되고 시인은 그 풍경을 드로잉하는 화가가 됩니다. 문태준 시인에게 시란 아마도 우리 앞에 서서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모든 것을 그리는 일인 것 같습니다. 여섯 번째 시집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창비, 2015)에 실린 “드로잉” 이라는 부제가 붙은 열네 편의 연작시가 시인의 시 쓰기 방식을 잘 알려줍니다.
문태준 시인의 시 안에는 사람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문태준 시인이 시를 통해 드문드문 언급하는 사람들은 주로 가족의 인연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슬픈 그믐”(「그믐이라 불리던 그녀」)같은 할머니, “시 외는”(「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 외할머니, “내 어릴적/ 눈에 검불이 들어갔을 때/ 찬물로 입을 행궈/ 내 눈동자를/ 내 혼을/ 가장 부드러운 살로/ 혀로/ 핥아주시던”(「혀」) 어머니, “돌무더기 집으로 저녁처럼 홀로 들어”(「나와 아버지의 폐원廢園」)가는 아버지, “내 숨결이 꺼져가는 화톳불 같이 아플 때/ 머위잎처럼 품어주던,/ 몸에서는 가뭄 끝 개울 물비린내 나던 고모.”(「화령고모」) 시인은 가끔 단순하고 순수한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아이와 눈사람」, 「가시가 박혔다고 우는 아이」, 「조금씩 자꾸 웃는 아이」) 아이들에 대한 시인의 묘사 안에는 아마도 사람의 원초적인 모습에 대한 시인의 향수가 묻어 있는 것 같습니다.(「비탈과 아이」, 「그 어머니」, 「속사速寫」) 문태준 시인의 시에 사람이 등장하는 경우는 가난과 소멸의 흐름 속에서 스러져 가는 사람들의 슬픈 운명의 모습을 담담하고 쓸쓸한 정조로 그려낼 때입니다. 문태준 시인이 불교적 허무의 세계관과 비극적 세계관에 깊은 영향을 받은 것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재미」와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이라는 두 편의 슬픈 절창은 죽음이라는 소멸의 풍경을 고요한 정물처럼 그려내고 있습니다.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 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가재미」) “당신은 나조차 알아보지 못하네/ ……/ 당신은 평범해지고 희미해지네/ 나는 이 세상에서 혼자의 몸이 된 당신을 보네/ 오래 잊지 말자는 말은 못하겠네/ 당신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네/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을 보네.”(「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문태준 시인에게 생은 별리(別離)와 소멸의 장입니다. “모두가 이별을 말할 때/ 먼 곳은 생겨”(「먼 곳」)나고, 우리의 생은 “바람에 밀리며 수북하게 쌓였다/ 흐물흐물 허물어지는”(「모래언덕」) 모래언덕 같습니다. 사람과 사물은 소멸과 생성을 반복하는 윤회의 굴레에 있습니다.(「영원永遠」, 「골짜기」) “무덤 위에 풀이 돋으니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 같아요…… 나는 무덤 위에 돋은 당신의 구체적인 몸을 한바구니 담아가니 이제 이 무덤에는 아마도 당신이 없을 거예요.”(「망실亡失」)
문태준 시인은 오래되고 잃어버렸던 것들, 먼 시절의 이야기여서 오래 잊었던 것들, 도시로 떠나와 오래 이별하고 있었던 고향(시골)의 것들에 대해 노래하고 있습니다. 허수경 시인은 문태준의 시가 오래된 옛 것들에 대한 일종의 제사(祭祀)같다고 말합니다. 문태준의 시는 “아득한 아름다움”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본래 아름다운 것들”을 상기시키는 저녁의 안부인사입니다.(『먼 곳』, 창비, 2012, 뒷표지 글에서) 문태준의 시는 오래된 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그리움의 헌사(獻辭)입니다. 너무 빠른 것을 슬퍼하면서 오래되고 느린 것들에 대한 “그리움의 힘”으로 바치는 노래입니다.(「바깥」) “창백한 서류와 무뚝뚝한 물품이 빼곡한 도시의 캐비닛 속”의 현실을 살아가지만 “맑은 날의 가지에서 초록잎처럼 빛”나는 것들에 대한 꿈을 노래하는 동시(童詩)입니다.(「지금 이곳에 있지 않았다면」) 비록 그 꿈이 “불안하게 반짝이는 서리처럼 잠깐 섰다 사라”(「불안하게 반짝이는 서리처럼」)진다 해도 말입니다. 때때로 생은 소년의 얼굴로 종이배를 타고 지나가는 일입니다. “나는 멀리서 와서 당신의 잔잔하고 고운 말을 듣습니다. 그리고 내 종이배에 싣습니다. 나의 생일과 어제 꺽은 칡꽃과 나의 걱정과 함께 당신의 깨끗한 시내를.”(「종이배」) 그저 우리가 할 일은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호수」) “꽃들은 낮밤과 계절을 잊고 사랑하며 계속 피어났지요.”(「꽃의 비밀」)
문태준의 시를 읽으며 오래된 것들의 아름다움을 다시 생각합니다. 낡고 사라지고 잊히고 잃어버렸던 것들을 다시 기억합니다. 물론 지난 시절의 것들이 다 아름답고 예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기억과 향수의 미화도 있을 것입니다. “전통(옛것)은 좋은 것이야.” 하는 상투적 감성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오래 놓쳐버린 것들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하는 일은 그 자체로 의미 있습니다. 소멸된 것들의 새로운 생성입니다. 잊혔던 것들이 기억을 통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참다운 전통이란 오늘을 억압하고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아름다움’을 다시 일깨우는 것입니다. 마음을 싣는 깊은 응시 속에서 오래된 것들이 아름답게 부활한다는 것을 문태준의 시에서 배웁니다.
오랜 신앙의 아름다움을 생각합니다. 오래된 신앙은 때때로 낡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그윽하고 웅숭깊은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오랜 신앙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종교적 행위의 습관적인 반복에서 발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래된 신앙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신앙 선조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하지만 정직하게 말해, 오늘의 교회에서 들려지고 있는 신앙 선조들의 이야기는 너무나 영웅적인 서사의 형식을 띠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신앙 선조들의, 순교 성인들의 화려한 영웅적 이야기는 오히려 그들이 증언하는 오랜 신앙의 아름다움을 때때로 가리는 장애물로 작동되기도 한다는 슬픈 역설을 우리는 압니다. 삶의 가난함을 살아내는 아름다운 신앙, 일상의 삶을 수행의 장으로 살아내는 눈부신 신앙이 그립습니다. 초라하고 남루하고 처연한 일상의 삶일지라도, 자기 생의 무게를 조용하고 그윽한 방식으로 지고 가는 신앙, 그런 신앙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풀들속으로 밀고 들어”가는 “바람만이 불러낼 수 있는”, “풀의 신앙”(「풀의 신앙」)이라는 시 구절을 읽으며 성령의 바람이 오늘의 우리들 안에 아름다운 신앙을 불러일으키기를 희망합니다.
[월간빛, 2019년 9월호, 정희완 요한 신부(안동교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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