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읽어주는 신부] 죽음을 의식하면서 생을 응시한다는 것은
동네를 끼고 있는 작은 산들을 산책하다 보면 산길 옆에서 여러 모습의 무덤들을 쉽게 발견합니다. 쓸쓸히 혼자 있는 무덤, 양지 바른 곳에 부부처럼 정겹게 나란히 있는 무덤, 석상들과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조성된 무덤, 방치되어 황폐한 모습으로 있는 그래서 버려진 것 같은 무덤. 삶의 형식과 죽음의 형식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마을의 뒷동산에 있는 무덤들은 공동묘지와 납골당이 주는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일정하게 구획된 공간에 자리잡은 공동묘지와 납골당은 생과 사의 경계를 뚜렷하게 드러냅니다. 하지만 동네의 뒷산 무덤들은 삶과 죽음이 서로 엉켜있음을 보여줍니다. 삶 안으로 들어와 있는 죽음의 흔적입니다.
살면서 죽음을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은 나이와 시기에 따라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죽음에 대한 생각과 느낌의 강도 역시 사람마다 다릅니다. 물론 살아있는 동안 죽음은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에 대한 모든 생각과 느낌은 간접 체험에서 비롯됩니다. 죽음은 추상적인 개념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사유와 인식 안에서 죽음은 일종의 철학적 개념으로 인지됩니다. 죽음의 실체와 그 의미에 대한 형이상학적 질문을 통해 죽음은 이성적 방식으로 이해됩니다. 머리로 인지하는 죽음입니다. 한편으로 죽음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기도 합니다. 부모와 가까운 친구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죽음을 마음으로 느낍니다. 감정과 정서의 방식으로 다가오는 죽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음을 몸의 노화를 통해 어렴풋이, 그러나 꽤 구체적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죽음을 생각(이성)과 마음(감정과 정서)과 몸(늙어가는 삶)으로 예감합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젊은 날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처구니없고 유치한 느낌이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적이 있습니다. 독일 시인 게오르크 트라클과 중국 시인 이하의 시를 읽으면서, 그 시인들처럼 나 역시 27세에 죽는 것이 아닐까 라는 치기의 생각으로 말입니다. 청춘의 관념이 빚어낸 풍경입니다. 사제가 되고 나서 장례미사 때와 일반 미사 때 죽음에 대해 강론을 하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생각과 개념 속에서의 추상적인 죽음에 대한 이해였을 뿐입니다. 죽음을 마음으로 깊이 실감한 것은 어머니의 죽음이었습니다. 사랑했던 사람을 잃어버리는 일은 죽음이 부재(不在)를 의미한다는 엄혹한 진실을 깨우쳐줍니다. 하지만 죽음이 자신의 소멸을 뜻한다는 것을 실감하게 하는 것은 몸의 노화와 늙어감이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죽음은 더 이상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닥쳐올 엄연한 현실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요즘 죽음의 소식이 들릴 때 그 망자의 나이를 눈여겨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얼마 전 미국 소설가 필립 로스가 죽었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었을 때 그의 나이와 내 나이를 겹쳐보면서, 아 내가 그 나이에 죽는다면 이제 25년이 남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생각과 개념으로서의 죽음이 아닌, 타인의 부재로서의 죽음이 아닌, 자신의 소멸로서의 죽음을 예감하는 일이 잦은 나이에 이르다보니 생을 바라보는 방식이 조금씩 변해가는 것을 느낍니다. 살면서 죽음을 의식한다는 것은 분명 슬픈 일입니다. 많은 것들이 허망하고 부질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죽음을 의식하는 일은, 상투적인 감상이지만 생의 소중함을 역설적으로 깨닫게 해줍니다. 노년의 삶이 청춘의 삶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주어진 노년의 삶 역시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죽음은(또는 죽음의 기표는) 생의 허망함과 생의 소중함을 동시에 알려주는 성사입니다. 쓸데없는 것들, 부질없는 것들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겠다고 자주 마음으로 맹세합니다. 비록 늙어가는 몸의 세월이지만 주님께서 허락한 시간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하는 날들의 연속입니다. 맹세와 다짐이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하지만 생각과 마음의 다짐은 행동과 삶의 변화를 시작하게 하는 매개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시인 조은(1960년생)은 안동 출신으로 지금까지 다섯 권의 시집을 냈습니다. 제가 조은 시인의 시를 처음 접한 것은 그의 두 번째 시집 『무덤을 맴도는 이유』(문학과지성사, 1996)를 통해서였습니다. 그 시집의 강렬한 인상이 계속 그의 시집을 따라 읽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시를 통해 그 흔한 문학상 하나 받지 못했습니다. 문단의 화려한 조명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의 시는 적어도 저에게는 늘 은은한 감상으로 남아있습니다. 조은의 시에 대해 쓰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통해 그에 대해 찾아보았습니다. 비혼으로 살고 있다는 것, 사직동의 작고 허름한 한옥에서 살아간다는 것, 그 낡은 집에 많은 문인과 유명인들이 들락거렸다는 정도의 정보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그의 시가 보여주는 내면의 풍경과 삶의 정경들이 그의 실제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왠지 기분이 좋았습니다. 시인의 실제의 일상과 그의 시를 구별해서 읽는 편이지만 시의 풍경과 시인의 일상의 정경이 서로 조응하는 것을 발견할 때 저는 즐겁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여러 권의 시집을 낸 시인들은 시집 제목의 변천 속에서 그의 생각과 느낌, 사유와 정서의 궤적이 드러납니다. 『땅은 주검을 호락호락 받아 주지 않는다』(민음사, 1991), 『무덤을 맴도는 이유』, 『따뜻한 흙』(문학과지성사, 2003), 『생의 빛살』(문학과지성사, 2010), 『옆 발자국』(문학과지성사, 2018). 시집 제목들은 죽음에서 삶을 찾아가는 여정(발자국) 같습니다. 사실, 우리의 실제 생은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여정이지만, 생의 의미는 죽음이라는 토양(흙) 위에서 빛이 납니다. 시인은 자신의 산문에서 고백합니다. “내가 무덤이라는 양식을 좋아하고 자주 찾아가는 것은 죽음을 통해야만 얻는 삶, 더 농도 짙은 삶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떠난 자들에게 무덤은 죽음의 양식이지만 산 자들에게 무덤은 삶을 자극하는 형식이다.”(『벼랑에서 살다』, 마음산책, 2001)고 말입니다. 시인에게 죽음은 삶의 도처에서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집들이 저만치에서/ 무덤의 모양새로 늘어서 있다/ 마을을 둘러싼 산들도/ 무덤의 형태를 갖고 있다.”(‘무덤의 형상들’)
알 수가 없다 내가 자꾸 무덤 곁에 오게 되는 이유 무덤 가까이에 몸을 둬야 겹겹의 모래 구릉 같은 하늘을 이고 나를 살게 하는 것들이 무덤처럼 형체를 갖는 이유
그러나, 알고 있다, 오늘도 나는 내 봉분 하나 넘어가지 못한다 새들은 곳곳에서 찢긴 하늘처럼 펄럭이고 그들만이 유일한 출구인 듯 눈이 부시다
알 수가 없다 무덤만 있는 이곳에 멈춰 있는 이유 막막함을 구부려 몸 속으로 되밀어넣으며 싱싱했던 것들이 썩는 열기를 느끼고 있는 이유
사람들이 몇 줄 글로 남겨놓은 비문을 찾아 읽거나 몸을 잿더미처럼 뒤지며 한 생명이 무덤 곁에 있다
‘무덤을 맴도는 이유’라는 시의 전문입니다.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그냥 정말 좋았습니다. 설명과 해석이 필요 없는 시입니다. “오늘도 나는/ 내 봉분 하나 넘어가지 못한다”는 구절을 제 강론에서 숱하게 인용했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걸어가는 인간의 정서적 본질에 대해 이 시만큼 더 설득력 있게 설명한 것을 적어도 저는 잘 찾지 못하겠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의 표현을 빌려서 말하면, 저에게는 이 시가 ‘인생시’의 하나입니다.
삶과 죽음은 뒤엉켜 있으며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빛을 발하고, 죽음은 삶을 통해 그 의미를 얻습니다. 이렇게 문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아름답게 서술해보지만 사실 공허한 느낌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살면서 죽음을 의식한다는 것은 정서적으로 어둠과 친밀하고 벼랑 끝의 느낌을 낳기 때문입니다. “한밤에 일어나/ 유언의 문구를 고르듯/ 그릇을 집어/ 차곡차곡 쌓는다.”(‘어둠의 질감’) “어둠은 늘 내 몸에서 시작된다/ 내가 있는 곳은 유독 어둡고”(‘나무는 뿌리 끝까지 잡아당긴다’), “근원도 두께도 알 수 없는/ 어두운 석실에 갇힌 듯 암담”(‘눈이 오는 곳에서’)하다고, 자신은 “어둠과 자웅동체처럼 붙어”(‘흐린 날의 귀가’) 있다고 시인은 탄식합니다. 죽음을 의식한다는 것은 “위태로운 것들이 갖는 애절한/ 아름다움에 눈을” 뜨는 것이고 “그 아슬아슬함에 전율하며” 사는 것입니다.(‘새들이 내 몸을 먹고 있다’) 단순히 삶을 예찬하는 시들은 늘 시들하고 밋밋하다고 그는 생각합니다.(‘느끼든, 못 느끼든’) 그래서 시인은 “벼랑에서 만나자. 부디 그곳에서 웃어 주고 악수도 벼랑에서 목숨처럼 해 다오”(‘지금은 비가 ······’)라고 외칩니다.
죽음을 의식하는 삶, 다시 말해 정서적 어둠 속 벼랑 끝에 서는 기분으로 산다는 것은 오히려 더 치열한 삶의 모습을 요청합니다. 죽음은 생의 의미를 다시 환기시키는 가장 분명한 기표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이라도 마음 닿아본 적 있는 생명이/ 죽은 것을 보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오래 내 곁에 머물렀던 것도/ 내 삶에 들어와 뒹굴며/ 웃고 울었던 것도/ 그 한 번의 깊이에는 닿지 못한다.”(‘깨끗하고 우아하게’) 하지만 죽음이라는 어둠이 삶의 새벽을 더갈망하게 합니다. “어둠을 탐닉했던/ 내게도 수많은 새벽이 있었”고 “어둠 속에서도/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있다고 시인은 생각합니다.(‘어둠의 자락’) 또 시인은 “나는 늘 순도 높은 어둠을 그리워했다/ 어둠을 이기며 스스로 빛나는 것들을 동경했다/ 겹겹의 흙더미를 뚫는/ 새벽 같은 언어를 갈망했다”고 고백합니다.(‘생의 빛살’)
시인은 아마도 시를 쓰면서, 삶을 담담하게 응시하면서 자신의 생을 견뎌온 것 같습니다. 그의 시 도처에 소멸과 사라짐의 과정과 흔적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시선들이 보입니다. “재개발을 앞둔 텅 빈 골목에”서 “사라지는 것을 지켜봤을 시간의 눈동자”를 상상하기도 하고(‘골목길’), 또 길의 한 가운데서 “누군가도 나처럼 여기 멈춰 서서/ 자신이 길의 소용돌이 속에 들어 있다는/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고 상상합니다.(‘소용돌이’) 연민과 공감의 마음으로 삶을 응시할 때 삶은 죽음의 어둠을 넘어 긍정의 다짐을 낳습니다. “잠시 앉았다 온 곳에서/ 씨앗들이 묻어 왔다// … 씨앗을 달고 그대로 살아보기로 한다.”(‘따뜻한 흙’)시인에게 생은 늘 신호등을 놓치는 방식으로 다가옵니다. “일찍 맺힌 산당화 꽃망울을 보다가/ 신호등을 놓친다/ 해마다 이맘때면 나는 영화의원 앞/ 신호등을 제때 건너지 못한다.”(‘일찍 피는 꽃들’) 시인은 “나는 오래/ 경계에서 살았다”고 “살아간다고 믿었을 땐/ 죽어가고 있었고/ 죽었다고 느꼈을 땐/ 죽지도 못했다”(‘빛 닿은 어둠처럼’)고, 또 “이렇게 살다가 내 삶이 끝나겠구나,/ 하는 절망이/ 이렇게 살면서도 내 삶이 끝나지 않겠구나,/ 하는 절망과 만난다”(‘독서대’)고 노래합니다. 그래서 “걷다보면 길은 변명처럼 늘어나고 있다”(‘길’)고 고백합니다. 생은 죽는 날까지 그렇게 늘 연장되고,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어쩔 수 없이 견뎌내고 살아내야 합니다.
깨달음은 언제나 뒤늦게 옵니다. 느낄 때쯤이면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말처럼, 생의 시간은 돌아보면 벌써 저만치 지나가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익숙한 산책로를 걷다가/ 맥을 놓고 앉은 노인을 지나왔다/ … 언젠가는 나도 어딘가에 주저앉아/ 그 같은 모습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게 될 거라고/ 그때는 지금보다 마음이 더 이상할 거라고/ 생각”(‘언젠가는 그런 모습으로’)한 적이 저도 있었습니다. 저도 시인처럼 예감했었습니다.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는 기억 때문에/ 슬퍼질 것이다/ 수많은 시간을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꽃들이 햇살을 어떻게 받는지/ 꽃들이 어둠을 어떻게 익히는지/ 외면한 채 한곳을 바라보며/ 고작 버스나 기다렸다는 기억에/ 목이 멜 것이다.”(‘언젠가는’)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 역시 시인처럼 가끔 후회합니다. “삶을 바라는 간절한 순간이/ 저렇게 돌이킬 수 없을 때 오다니// 삶을 허비하는 나를/ 처단하고 있는가”(‘뇌 속이 기왓골처럼 밟힌다’)
나에게 남겨진 생의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음을 절감하는 나이에 이르렀습니다. 또 다시 때늦은 후회들로 생을 낭비할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살면서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이 허무와 비관으로 빠지게 하기 보다는 순도 높은 삶을 향한 동력으로 작동된다는 것도 알 것 같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부질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과 번잡함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종의 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삶이여, 죽음에 닿아보는 이 순간은/ 너도 내게서 쉬고 있구나!”(‘묘비명’) 죽음의 눈으로 생을 응시할 때 삶은 더욱 빛난다는 것을 이제는 알 것도 같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죽음을 넘어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고백합니다. 저 역시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고 희망합니다. 하지만 죽음 이후의 문제는 철저히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그저 믿고 희망할 뿐입니다. 가톨릭교회의 교리 가운데 제가 좋아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인의 통공’이라는 교리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산 이와 죽은 이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믿는 교리입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 안에서 서로 연결되고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참 매혹적입니다. 삶과 죽음도, 산 이와 죽은 이도 주님 안에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그 믿음은 조금은 허망한 이 이승의 삶을 견디게 해줍니다. 조은 시인의 시를 읽으며, 삶은 죽음을 매개로 더욱 빛난다는 사실을, 성인의 통공 교리가 얼마나 아름다운 교리인지를 다시 생각합니다.
[월간빛, 2018년 7월호, 정희완 요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조직신학 교수, 안동교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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