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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삶은 존재하는가?

배델창 2020. 1. 31. 10:19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완전한 사람이 되기를 꿈꿔 왔습니다.

성부께서 완전하심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하신 주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해 왔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완전한 사람이 되었음을 자처하거나, 자신들의 삶이 사람들을 완전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럼 과연 사람들 중에서 그렇게 완전한 사람, 완덕을 성취한 사람이 있었는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없었습니다.

오히려 완전하고자 하는 강박적인 바람은 심각한 심리적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신앙적 오류를 범하는 사람들로 규정한 바 있습니다. 12세기 말 베네룩스 제국에서 시작된 금욕수도원인 베가르회. 그들은 자신들처럼 살면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교황 클레멘스 5세는 비엔 공의회(1311~1312)에서 이들을 신앙적 오류를 범하는 사람들로 규정하고 배척하였습니다.


클레멘스 교황은 왜 그들을 단죄하였는가?

사람이 완전한 덕을 가지고 살기에는 내적으로 하자가 많은 존재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통찰을 가지셨기에, 마음 안의 수많은 콤플렉스와 상처들이 완전함을 지향하는 사람들을 빗나간 길로 끌어감을 아시고 정죄하신 것입니다.

대개 완전한 사람이 되기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강박적 성향을 가진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또한 완전한 삶을 산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우월한 존재라는 자의식을 갖습니다. 말은 겸손한데,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으려고 하고, 배타적인 무리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완전하다는 착각에 빠지면,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을 찬미하는 자위적 기도생활을 합니다.

저 세리보다 낫게 살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한 바리사이처럼. 한 치의 오류나 한 오라기 죄도 짓지 않는다는 생각은 완전함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강박적 신앙, 우월 콤플렉스, 심한 공격성과 심한 억압 등 여러 가지 심리적 부작용을 낳습니다. 대천사 루치펠, 악마가 된 그는 사람들이 완전함을 지향할 때 그 끝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존재입니다.

 

완전함이란 하자 없음이 아니며,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완전함을 지향하는 삶이라고 영성가들은 말합니다. 겸손이란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사랑이란 불완전한 상태에서 불완전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노력이라고. 그리고 영성 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소위 세속적인 사람들과 자신을 차별화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즐기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 그리고 늘 사람들 속에 계신 것은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말씀에 매달리고 자신에게 덜 집착하면 진정한 신앙인이 될 수 있다는 분들이 계십니다. 자기부정을 하고, 오로지 하느님의 뜻만을 생각하라는 분들도 계시고요.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신앙생활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분들도.


대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은 믿음에 대한 의심이나 물음을 갖는 것조차 아주 심하게 나무라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렇듯 신앙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얼핏 보면 하느님께 가까이 간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내적인 상태는 그리 건강치가 않습니다. 자기 마음을 함부로 다루기에 약한 마음이 상처투성이가 된 데다, 지나치게 엄격한 신앙생활이 마음 안에 심각하고 병적인 콤플렉스들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사람의 영적 수준을 가늠할 때 기도시간의 양을 보았습니다. 하루 종일 기도하면 거의 성인 대접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현대 영성에서는 대인관계를 중요시 여깁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소원하면 내적 상태가 성숙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삶은 일상생활에서 오는 잡다한 방해와 책임감 속에서 자신과 서로를 사랑하는 가운데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영성생활에 방해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내적인 안정감과 건강성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사람들에게 가까이 감으로써 나를 더 잘 알게 되고, 사람들을 통하여 세상을 더 알게 되고, 하느님의 뜻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동등하게 실천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진정한 이웃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헌신하려고 하는 것은 낮은 자존감에서 비롯된 신경증적 행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종이 아니라 벗이라고 부르겠다고 하셨고,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받을 수 있는 존재라고 이미 말씀하신 바 있으십니다. 성부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사람들을 위하여 보내시기까지 하셨습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사람이 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한사코 자신이 죄인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부인한다면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거부하는 또 다른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용서를 거부하는 행위를 교만함의 극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용서받으면서 사는 존재들입니다. 사람은 태생부터 허물이 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자신이 용서받는 존재임을 인식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고, 마음의 움직임에 대한 통찰을 가진다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어떻게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조금씩 알게 되고, 조금씩 건강해지고, 자유로움을 얻게 될 것입니다.


* 홍성남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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